숨막힌 반전, 숨죽인 무의식대본 ★★★★ 연기 ★★★☆ 무대 ★★★
스릴러의 재미와 인간 내면 무의식의 심연을 함께 포착한 연극 ‘추적’에서 도플러 형사로 위장한 마일로역의 박정환 씨(왼쪽)와 귀족적인 추리소설 작가 앤드루 역을 맡은 전노민 씨. 각각 뮤지컬 무대와 TV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해온 두 배우는 이 숨가쁜 2인극에서 차가운 남성미를 짙게 드러낸다. 사진 제공 인터스페이스아트그룹
두 남자의 쫓고 쫓기는 심리극
인간 무의식 구조 절묘한 포착
한 마리 암컷을 놓고 펼치는 두 마리 수컷의 자존심 게임. 스릴러 연극 ‘추적’(연출 이종오)의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는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구조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인간 무의식의 구조를 절묘하게 포착한 심연이 발견된다. ‘에쿠우스’의 작가 피터 섀퍼의 쌍둥이 형인 앤서니 섀퍼의 원작을 무대화한 이 연극에는 동생의 작품보다 더 탄탄한 무의식 구조가 숨어 있다.
연극의 무대는 영국의 귀족적인 추리소설 작가 앤드루 와이크(전노민)의 시골 저택이다. 텅 빈 집에서 홀로 소설을 쓰고 있던 앤드루는 젊은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놀랍게도 아내 마거릿의 내연남인 마일로 틴들(박정환)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방문이 앤드루의 초청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중함을 가장한 허세와 냉소로 위장한 질투가 뒤섞인 두 연적의 대화는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합의에 도달한다. 앤드루가 이혼해주는 대신 마일로가 그날 밤 그 저택의 금고 속 보석을 훔친다는 것이다. 젊은 내연녀를 둔 앤드루는 엄청난 보험금을 바로 현금화하고 마일로는 보석을 차지해 마거릿의 낭비벽을 감당하자는 ‘합리적’ 윈윈 전략의 산물이다.
2막은 며칠 후 같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실종된 마일로의 행방을 찾는다는 늙은 도플러 경위의 방문을 받은 앤드루는 자신이 마일로를 죽였다는 압도적 증거들 앞에 당황한다.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앤드루가 정말 마일로를 죽인 것인가.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앤드루에게 수갑을 채운 도플러 경위가 마일로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수컷의 게임스코어가 1 대 1이 되는가 싶은 순간 또 다른 반전이 펼쳐진다.
1970년 토니상 작품상 수상작으로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해럴드 핀터가 2007년 영화화하기도 한 이 작품은 정신분석학의 보고다. 우선 앤드루와 마일로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이다. 앤드루가 어머니(마거릿)를 차지한 아버지라면 마일로는 그로부터 어머니를 뺏으려는 아들이다.
앤드루는 게임의 규칙을 규정하는 질서와 금기의 담지자다. 그는 이성과 언어로 구성된 추리소설의 세계를 닮은 상징계(의식의 세계)를 대표하는 존재다. 반면 마일로는 그 상징계에서 ‘상징적 죽음’(거세)을 경험한 아들이면서 아버지가 주재하는 상징계를 거부하는 ‘죽지 않고 돌아온 아들’이다. 그는 상징계의 허위와 기만을 고발하는 실재계(무의식의 세계)를 표상한다. 두 남자의 연결고리이면서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마거릿은 남성 욕망의 공백을 채워주는 환상적 존재로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명제와 공명한다.
마일로는 두 번의 게임을 통해 앤드루를 함정에 빠뜨린다. 첫째는 앤드루가 정한 게임의 규칙을 따른 방식이지만 두 번째는 그 규칙을 철저히 위반하는 방식이다. 앤드루는 첫 번째 방식에선 미소를 잃지 않지만 두 번째 방식에선 이성을 잃고 만다. 상징계의 커튼에 감춰져 있던 실재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성의 무력함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출가와 연기자가 작품의 이런 심층구조까지 읽어내지는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단 두 명의 배우가 두 시간 가까이 펼치는 팽팽한 연기 대결은 이렇게 구조화돼 있는 원작의 묘미를 잘 살려낸다. 앤드루 역으로 양재성 씨, 마일로 역으로 이승주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Q] 3만∼5만 원. 20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2647-8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