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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윤석민]성내천이 다시 썩는 날

입력 | 2010-06-09 03:00:00


푼수처럼 동네 자랑을 해야겠다. 필자 가족이 살고 있는 서울 송파구 동쪽 끝자락을 흐르는 아름다운 성내천에 대해서다. 기실 필자의 아파트 단지 앞에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올림픽 공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서울, 더 나아가 전 국민을 위한 공간이다. 그에 비해 성내천은 오롯이 인접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운동 및 휴식공간이다.

성내천은 마천동에서 시작해 오금동 및 오륜동 아파트 단지를 관통해 아산병원을 옆에 끼고 풍납동의 자못 웅장한 방죽 사이를 흘러 한강과 만난다.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구간은 올림픽공원과 한국체육대학의 경계를 따라 최근 난간 붕괴 사고가 났던 청룡교까지 이어지는 넓게 트인 구역이다. 그곳에 필자는 말 그대로 매일 간다.

해 잘 들고 아늑한 성내천은 봄철에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흐드러진 꽃 천지가 된다. 여름이면 숨을 참고 걸음을 재촉할 만큼 지독한 하수 냄새가 풍기는 곳도 가끔 있지만, 울창한 나무그늘이며 시원하게 물을 뿜는 분수며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 공간이 구석구석 사람들을 반긴다. 가을이 되면 성내천은 곱게 물든 나무들, 바람에 사각거리는 물가의 갈대들로 고즈넉하다. 그리고 겨울철 성내천은 하얀 눈밭이 된다. 물이 꽁꽁 얼어 아이들과 함께 썰매를 지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연말연시쯤 벌거벗은 나무들은 전구들로 예쁘게 장식된다.

4대강, 성내천처럼 부활시켜야

이곳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두껍게 발라진 콘크리트위로 시커멓게 썩은 물줄기가 가늘게 흐르던 죽은 하천이었다.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 깨진 병 조각, 악취로 가득 차 누구도 다가가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던 혐오공간이었다. 그 콘크리트를 깨뜨려 걷어낼 때 연말이면 갈아 치우는 보도블록처럼 쓸데없는 예산낭비라 생각했다. 저 시궁창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완전한 오산이었다.

서울시와 송파구가 힘을 모아 한강물과 지하철 용출수가 유입되고, 천변에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수생식물과 나무들이 심어졌다. 물고기 들짐승 새 심지어 곤충들이 옮겨졌다. 기억 속에서나 아련한 어릴 적 시골의 하천이 되살아났다.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기획, 추진된 친환경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변화였다.

더욱 놀라운 건 이곳에서 지역 내 이웃들이 서로를 재발견하게 된 일이다. 성내천을 걸으며 오다가다 마주치는 이들끼리 반갑게 눈인사를 나눈다. 즉석 음악회에서 함께 어울려 박수치고 환호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성냥갑 같은 아파트 공간에 박혀 옆집에 누가 사는지, 주변 환경이 어떠한지 전혀 무관심했던 모래알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의 눈에 타인이 들어오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역은 얼마나 중요한가. 지역은 우리의 삶이 정초하는 최종거점(last one mile)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온통 개인의 과잉, 국가의 과잉이었다. 일상 속에 이웃을 만나고 공동체를 경험하는 기회와 공간은 사실상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지역은 존재했다. 외진 곳에 만들어진 연병장 같은 운동시설, 끊어지기 일쑤인 아찔한 자전거도로, 겉보기만 그럴듯하지 운영은 형편없는 공공시설, 그것이 지역이었다. 우리 집, 우리나라는 있었지만 우리 지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성내천이 되살린 게 바로 이 지역이다.

성내천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질 수 있을까? 한축으로 과잉되거나 불필요한 전시행정, 다른 한축으로 야비한 이기심이 이 소중한 공유지를 불모지화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이념 앞에 지역이 상실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

지난 6월2일 지방자치선거에서 야권의 맹장들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들은 당선 제일성으로 ‘4대강 개발사업의 전면 폐지와 세종시 수정안 철회’를 외쳤다. 그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쟁하겠노라 선언했다.

지역일꾼, 소중한 공유지 가꾸길

지난 몇 년 권력을 잃고 절치부심했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당과 야당의 정치인이기에 앞서 지역의 일꾼이다. 우리 삶의 최종거점을 챙기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그 과정에 중앙과 협조하고 도움을 받을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제일성은 어두운 적란운처럼 불길하게 다가온다.

새롭게 당선된 지역 대표들이 중앙권력에 맞서는 투쟁수단으로 지역 권력을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일이 없길 필자는 간절히 기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중앙과 지역, 지역과 지역, 기관장과 의원들이 사분오열되어 극한적 갈등구도로 치달릴 때, 제2, 제3의 성내천이 등장하기는커녕 이전에 만들어낸 성내천의 맑은 물길마저 끊어지고 말 것이다. 만에 하나 성내천이 다시 썩는 날, 그 날이 오면 아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