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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맛!]후루룩! 여름밤의 별미가 된 어부 간식… ‘물회’

입력 | 2010-06-18 03:00:00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의 ‘파장 罷場’에서>》



그렇다. 못난 놈들은 하루만 얼굴을 못 봐도 불안하다. 끈적끈적한 여름날.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릴 때면 ‘가난한 친구’들이 그립다. 다 어디로 갔을까. 만나봐야 허튼소리나 지껄이겠지만 그래도 찧고 까불며 낄낄댈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쓸데없는 소리해가며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우리 슬픈 젊은 날, 우리는 그렇게 ‘객쩍은 소리’를 해대며 ‘기나긴 여름 해’를 죽였다.

입맛이 꺼끌꺼끌하다. 뭘 먹어도 밍밍하다. 오늘 점심은 뭐를 먹을까. 딱히 당기는 게 없다. 배 속이 헛헛하다. 뭐 좀 시원하고 화끈한 게 없을까. 문득 탁! 하고 무릎을 친다. 물회! 오장육부가 한순간에 시원해지는 물회! 강릉이나 속초에서 먹어본 새콤달콤 오징어물회! 포항이나 울산의 향긋한 도다리물회! 부산의 쫄깃한 가자미물회! 오도독 뼈째 씹히는 제주 자리물회! 오징어보다 더 맛있는 한치물회!

물회는 생선을 물에 만 것이다. ‘물에 만 생선’이 물회인 것이다. 세상에! 맨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은 몰라도, 생선을 물에 말아 먹다니! 하지만 동해안이나 제주 서귀포해안 사람들은 물회를 먹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간밤에 술로 찌든 속도 물회로 다스린다. 뜨거운 해장국이 아니라 얼음 동동 뜬 차가운 물회로 속을 푸는 것이다.

물회는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뱃전에서 간단하게 배고픔을 달랬던 간이음식이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에 지쳐 허기질 때, 새참으로 한 그릇 먹고 다시 일에 나섰던 음식이다. 요리법도 간단하다. 오징어 도다리 가자미 자리돔 한치 등 갓 잡아 올린 생선을 회로 뜬 뒤, 여기에 온갖 야채를 썰어 넣고 양념장으로 버무린다. 그리고 얼음물을 부어 먹으면 끝이다. 어부와 해녀들은 후루룩 국물 마시듯 물회 한 그릇 먹고 다시 작업에 나섰다. 동해안에선 양념장에 고추장을 주로 쓰지만, 제주에선 된장을 주로 쓰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

물회는 우선 생선이 싱싱해야 한다. 씹히는 맛이 푸석하거나 물컹하고 무른 것은 물회가 아니다. 생선은 어느 것이든 제각각의 독특한 맛이 있다. 오징어, 도다리, 가자미, 한치, 자리돔뿐만 아니라 새우, 갑오징어, 참치, 우럭, 꽁치, 전복, 소라, 쥐치 등도 물회로 먹으면 일품이다.

물회에 넣는 야채는 오이, 무, 양파, 당근, 상추, 깻잎, 부추, 돌나물, 미나리, 배 등 거의 모든 게 가능하다. 가늘게 채 썰어 넣는 게 좋다. 국물도 어부들의 뱃전 물회에선 찬물이나 사이다를 부어 먹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요즘은 배를 갈아 넣거나 매실진액, 다시마진액, 오미자진액, 꿀 등으로 맛을 낸다. 시장에서 파는 냉면육수에 물을 섞어 물회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양념장은 고춧가루, 고추장, 다진 마늘, 다진 파, 소금, 겨자, 후추, 물엿, 식초, 설탕, 참기름, 통깨 등을 섞어 만든다. 강원도 물회는 식초 고추장 설탕을 주로 섞어 새콤달콤한 맛이 강하다. 제주 자리물회는 된장을 주로 하고 여기에 고추장을 살짝 섞어 담담하면서도 구수하다. 물회는 웃기로 해삼이나 전복을 몇 조각 얹어먹으면 그 씹히는 맛이 아득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포항이 고향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포항죽도시장의 한 횟집을 방문해 도다리물회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이 대통령은 “어릴 때는 한치나 오징어물회를 먹었는데 도다리물회도 아주 맛있다”고 말했다. 포항시에선 아예 서울 17곳, 경기 13곳의 횟집을 포항물회 전문점으로 지정해 수도권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횟감은 당일 포항에서 배달해준다. 1호점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동해별관(02-3445-7979). 문의 포항시청해양수산과 054-270-2852, 054-270-2853

요즘은 물회도 서울에서 맛볼 수 있다. 해안만큼은 아니지만 택배가 발달해 물횟감이 비교적 싱싱하다. 포항 영일 속초 울진 부산 등이 붙은 횟집에선 대부분 물회를 먹을 수 있다. 노량진이나 가락시장에서 생선을 사다가 직접 물회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부근의 한라의 집(02-737-7484)은 제주에서 당일 횟감이 공수된다. 오독오독 씹히는 자리물회를 맛볼 수 있다.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에 있는 태평양참치(02-930-3434)는 SBS ‘생활의 달인’에 참치물회로 소개됐던 곳이다.

자리돔은 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바닷물고기이다. 자리돔은 ‘돔’자 붙은 물고기 중에서도 가장 작은 못난이다. 5∼6cm나 될까. 붕어보다도 작다. ‘잔(작은) 돔’이 ‘자리 돔’이 됐다. 자리는 떼 지어 제주 해안가를 몰려다닌다. 한자리를 떠돈다 해서 ‘자리’가 됐다는 설도 있다. 모슬포나 서귀포 보목포구 것을 으뜸으로 친다. 자리물회는 비린내가 나지 않고 구수하다. 뼈와 함께 씹히는 맛도 황홀하다. 제주 사람들은 ‘자리물회 5번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필요 없다’고 말한다.

제주 한치물회도 놓치기 아깝다. 한치는 다리가 10개인 오징어와 사촌이다. 화살오징어라고도 한다. 다리가 한 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아 한치다. 한치가 쌀밥이라면 오징어는 보리밥이다. 한치가 인절미라면 오징어는 개떡이다. 그만큼 한치는 씹히는 맛이 오징어보다 훨씬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다.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물회 먹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보통 회를 다 건져먹은 뒤, 뜨거운 밥이나 소면을 말아 먹는다. 하지만 반쯤 회를 건져먹은 뒤 밥이나 소면을 말아 먹는 사람, 아예 처음부터 말아 먹는 사람, 처음엔 회덮밥식으로 먹다가 반쯤 남았을 때 물을 부어먹는 사람 등 입맛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후루룩! 물회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가슴속, 시린 화살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거리는 아득하다. 가도 가도 황톳길이다. 한여름 밤. 물회 한 그릇에 목이 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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