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중국과의 연대에도 나섰다. 중국은 1949년 5월 북한의 지원요청에 대해 “국민당을 패퇴시켜 중국을 완전히 지배할 때까지 결정적인 행동을 기다려 달라”고 밝혔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와 전투 중이었다. 1949년 가을 중국의 공산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지원 약속까지 받았다. 북한은 1950년 5월 중국에도 지원을 요청한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이 동의해준 것이 맞는지 확인해본 뒤 전쟁을 승인했다. 6·25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합작이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이승만)에 더 많이 지우는 수정주의가 등장해 현대사 연구의 헤게모니를 차지했지만 소련과 중국의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북침’을 날조해 주장하고 있다. 북한 교과서 ‘현대조선력사’는 ‘리승만(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3일부터 38도선의 공화국 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포사격을 했으며 6월 25일에는 전면전쟁으로 확대됐다’고 적고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