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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2004-2005년 국가훈장 ‘동티모르의 히딩크’ 김신환 감독

입력 | 2010-06-21 03:00:00

“동티모르 아이들은 축구를 배웠고, 나는 희망을 건졌다”

인구 100만명 섬나라서 국제유소년대회 우승… 2004-2005년 국가훈장 ‘동티모르의 히딩크’

사업실패-이혼 겪고 무작정 향했던 절망의 땅
차렸던 가게 폐업뒤 “축구 가르치자” 결심
2년만에 기적 일궈… ‘맨발의 꿈’ 영화로




17일 본사 사옥에서 만난 김신환 감독. 한때 잘나가던 축구선수였으나 잇따른 사업 실패로 인생 막장까지 몰렸다가 동티모르에서 희망을 찾았다는 김 감독은 “나를 위해 살 때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을 동티모르에서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는 동티모르 유소년축구팀을 만들고 국제대회 우승까지 이뤄 ‘동티모르 국민영웅’으로 불린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2001년 10월 동티모르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김신환 감독(53)의 머릿속을 채운 단어들은 돈, 패배, 분노, 복수, 억울함, 포기 같은 것들이었다. 잇따른 사업실패와 이혼까지 겪으며 인생 막장으로 몰린 마흔다섯의 중년 남자는 도망치듯 이국땅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은 가난하고 힘겨웠다.

‘나보다 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김 감독의 좌절은 사치가 아닌가 할 정도였다. 뭔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축구’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행복해진 것은 김 감독이었다. 김 감독이 동티모르를 구원한 게 아니라 동티모르가 그를 구원한 것이라고나 할까.

현재 동티모르 유소년축구팀을 이끌고 있는 그는 ‘동티모르의 히딩크’로 불린다. 2004년 일본 히로시마 ‘제30회 리베리노컵 국제유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해 나라 이름조차 몰랐던 세계인들에게 동티모르를 알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 208개국 중 204위로 축구 후진국 동티모르에서 유소년팀을 이끌며 아시아청소년축구 16강에 올려놓는 기적을 이루기도 했다(결선은 10월).

2004, 2005년 연달아 동티모르 국가 훈장을 받은 그는 현재 동티모르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 영웅이다.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선수들에게 ‘아버지’로 통하는 김신환 감독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모였다 하면 공을 차고 축구 이야기를 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월드컵 4강 신화라는 기적을 이룬 한국은 ‘롤 모델 국가’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미래를소유한사람들

그의 인생을 영화로 만든 ‘맨발의 꿈’이 24일 전국 350여 개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한다. 김태균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이례적으로 이달 1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시사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 동티모르에는 유엔평화유지군이 나가 있다.) 영화 개봉에 맞춰 서울에 온 김 감독을 17일 만났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환한 미소에서는 긍정의 에너지가 넘쳤다. 한때 ‘인생의 루저(loser)’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동티모르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이란 게 나를 위해 살 때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엇을 갖지 못했나’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이 남자는 지금 통장에 잔액 한푼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진짜 부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가 동티모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빠올로’ 때문이었다. 1997년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에서 목재업을 할 때 만난 빠올로는 당시 동티모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외국으로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향수병을 달래며 속을 터놓으면서 그와 김 감독은 쉽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빠올로는 경찰에 붙잡혀갔고 이후 소식이 끊겼다.

김 감독도 사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사업을 접고 귀국한 뒤 허송세월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동티모르가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빠올로가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도망치고도 싶었다. 그는 낡은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동티모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참하다 싶을 정도로 못살았다. 시내 건물들은 폭격을 맞은 듯 무너진 채 버려져 있었고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넋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돈 벌 거리라도 있을까 잠시 생각했던 것이 마치 죄라도 진 듯 자책감마저 들었다.”

어렵게 수소문한 빠올로 소식도 절망적이었다. 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사업도, 친구와의 재회도 이뤄지지 못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한 전날, 김 감독은 ‘달리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호텔 근처 운동장을 찾았다. ‘축구공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날 그의 인생도 기다리지 않은 곳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는 대여섯 살짜리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한데 엉켜 축구를 하고 있었다. 풀 반 흙 반인 땅에서 ‘바글바글’ 모인 그들은 천을 기워 만든 공을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진지하고 즐거웠다. 동티모르에서 처음 만나는 밝은 얼굴들이었다.

김 감독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생존의 도구이자 한(恨)의 대상이었던 축구가 이렇게 즐거운 일일 수 있다니.’

그는 장항중학교 시절 충남대표를 시작으로 축구 명문으로 꼽히는 한양공고에 진학해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비록 대학에는 못 갔지만, 당시 최고의 실업팀 해군과 현대자동차에서 30세까지 선수로 뛰었다.

김 감독은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흐르던 회상을 접고 곧장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갔다.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놀란 동티모르 사람들이 그의 드리블 실력을 보더니 박수를 쳤다.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다행히 김 감독이 인도네시아 말을 할 줄 알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김 감독이 “한국 축구선수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질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공을 차고 축구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 이 나라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자.”

마침내 그는 2002년 11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동티모르로 갔다. 처음엔 생계도 해결하고 선수들도 뽑겠다는 생각에 수도 딜리에 스포츠용품점을 냈지만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외상값을 떼어 먹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게는 무슨 가게, 아이들에게 전념하자.’ 이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축구를 배우겠다고 온 아이들뿐이었다. ‘마음씨 좋은 코레안이 옷도 주고 신발도 주면서 축구를 가르쳐 준다’는 소문을 듣고 전역에서 몰린 아이들 중 40명을 추려 팀을 꾸렸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 한다는 비난을 참아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집중력이 없는 아이들의 정신상태를 바꾸는 일이 더 힘들었다. 동티모르 아이들은 500년 가까이 남의 지배를 받다 보니 ‘의욕 유전자’가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다.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없었고 몸도 제대로 씻지 않았다.

김 감독은 인사하는 습관, 이 닦는 습관부터 가르쳤다. 공을 다루는 기술보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 애썼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의 기적, 월드컵의 기적을 이룬 한국 역사를 들려주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한 번도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뒹군 지 2년 만에 김 감독은 기적을 이룬다. 2004년 3월 27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리베리노컵 대회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을 4-2 역전으로 꺾고 우승한 것. (리베니노컵 대회는 1974년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인 로베르토 리베리노가 아시아 어린이 축구 발전을 위해 만든 국제대회로 해마다 3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다. 매년 한국 일본 등 32개국이 참여한다.)

일약 김 감독은 동티모르의 영웅이 되었다. 선수단이 귀국하던 날 동티모르 독립 이후 처음으로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국제대회 우승은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친구를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경계와 시기, 질투,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김 감독을 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형제로 대했다. 이어 이듬해 열린 리베리노컵 대회에서 다시 우승하자 세계 축구계까지 김 감독을 주목했다. 거액의 연봉을 줄 테니 싱가포르 축구팀을 맡아 달라는 제의도 왔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희망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티모르 아이들을 통해서 희망이 생겼다. 돈이 없는 것은 조금 없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내게 희망을 준 아이들을 버릴 수가 없다.”

가난한 나라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그는 한국에서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버티고 있다. 집도 없고 돈도 없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는 그는 흡사 종교인 같았다. 김 감독은 국적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축구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을 “모두 내 아들들”이라고 말한다. 체력이나 체격이 따라주지 않아 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는 눈가에 물기가 보였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다. 남에게 내세울 만큼 잘난 것도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나라에 가서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 감독은 “지금 동티모르 청소년들의 가장 큰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업률이 50%에 달하는 그 나라 청소년들에게 축구는 성공하고 싶은 꿈을 달성하는 몇 안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김 감독의 말을 들으니, 지금 이 지구촌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 축구는 스포츠 그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우리의 몸은 뛰고 환호하기 위한 것, 서로/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최선을 다한 패배는 승리만큼 아름다우며/…/진실된 땀은 헛되지 않을지니/정의가 펄펄 살아있는/여기 이 푸른 잔디 위에/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묻어라.’(최영미 시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중)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동티모르, 450년 식민통치 끝나자 내전 등으로 30만 명 사망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있는 티모르 섬의 동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섬나라. 티모르 섬 서쪽 절반은 인도네시아 영토다. 인구는 대략 100만 명. 면적은 우리나라 강원도만 하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이고 가장 높은 산은 타타마이라우 산으로 해발 2963m나 된다.

16세기 초반부터 무려 450여 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는 아예 없다. 1975년 포르투갈이 물러가자 독립파와 인도네시아 합병파 간에 내전이 벌어졌고 이듬해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한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침공한다. 그리고 침공 두 달 만에 주민의 10%에 해당하는 7만 명을 학살한 데 이어 농경지와 주택, 일부 있었던 산업시설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초토화시켰다. 2002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 독립할 때까지 27년 동안 30만 명이 기아와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독립 후에도 독립파와 인도네시아 지지파 사이에 갈등이 계속돼 2006년 또 한 번의 격심한 내전을 겪었다. 그 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다.<김신환 감독의 자서전 ‘맨발의 기적’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