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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 마라도나는 친한파(親韓派)다

입력 | 2010-06-24 14:22:48


23일 열린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그리스의 경기. 후반 32분 아르헨티나의 데미첼리스가 골을 넣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르헨티나 보다 더 좋아한 쪽은 한국 팬들이었다. 한국과 그리스가 1승1패로 동률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확실하게 이겨줘야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실해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게는 2승으로 16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은 아르헨티나가 그리스전에 어떻게 나설지가 관심거리였다.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 팀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리오넬 메시의 출전 여부에 이목이 집중됐다.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감독은 처음에는 "메시를 좀 쉬게 하고 후보 선수를 대폭 출전 시키겠다"고 했다가 "메시를 경기에 안 내보내는 것은 축구팬에 대해 죄짓는 것"이라며 메시를 출전시켰다. 물론 마라도나 감독이 한국을 위해서 메시를 출전시킨 것은 아니지만 메시는 그리스전에서 맹활약하면서 2-0 승리를 이끌어내 한국의 16강 진출을 더욱 공고하게 했다.

브라질 출신의 펠레와 함께 '축구 황제'로 불리는 마라도나. 그는 이처럼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그동안 한국축구를 도와준 '친한파(親韓派)'다.

1995년 9월21일 마라도나는 한국 축구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한국에 왔다. 그가 내한한 이유는 2002 월드컵의 유치를 위해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한국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은 몇 년 전부터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에 나섰던 일본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특히 일본은 펠레와 지코 등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을 비롯해 많은 세계적인 유명 축구 관계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유치를 자신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불세출의 축구 스타 마라도나가 한국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한국 유치위원회에게 큰 힘이 됐다. 마라도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여러 가지로 검토해봤는데 한국이 경기력과 전통에서 일본에 앞선다.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을 앞세워 피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러 번의 월드컵에 출전하며 아시아축구를 대표하는 한국이 월드컵을 유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선언했다.

이때 마라도나는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코카인 양성 반응에 걸려 15개월 간 선수 생활을 중단했던 그는 재기전 장소로 한국을 택했고, 그가 속한 보카 주니어스 팀을 이끌고 한국축구대표팀과 경기를 통해 선수 생활을 재개했다. 마라도나가 다녀가고 8개월 후인 1996년 5월, 결국 한국은 일본과 2002 월드컵 개최권을 공동으로 따냈다.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대표팀은 이번 남아공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을 4-1로 대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6강 진출을 이룬 한국에게는 좋은 '예방 주사'가 됐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자책골을 기록하고, 공, 수비에 걸쳐 많은 허점을 노출시켰다. 경기 후 한국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는 문제점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됐고, 심기일전으로 나이지리아전에 임할 수 있었다.

한국의 16강전 상대는 남미의 복병 우루과이.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보다는 한 수 아래의 팀. 따라서 아르헨티나에게 혹독한 맛을 본 한국으로서는 우루과이전 대비를 좀 더 철저하게 할 수 있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도 더욱 크게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각각 B조 1, 2위로 16강에 오른 아르헨티나와 한국은 토너먼트로 펼쳐지는 16강전에서는 별도의 시드로 나눠져 결승전에 가서야 맞붙을 수 있게 됐다.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세계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한국축구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운' 마라도나.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나란히 결승에 올라 허정무 한국 감독과 신경전을 벌이는 마라도나 감독의 모습을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