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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주년]“6·25는 결코 잊을수 없는 경험…인생 고비마다 큰힘 줘”

입력 | 2010-06-25 03:00:00

■ 6·25 참전 美전직의원 2명 방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는 6·25전쟁은 참전용사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전쟁터를 떠나 살아가는 동안 이들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은 중요한 시기마다 큰 힘이 됐다. 또 한국의 성장은 ‘뭔가 보람이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6·25전쟁 60년을 맞아 정부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의 참전용사 존 머피(84), 로버트 가르시아 씨(77)에게도 한국은 그런 의미를 갖는다. 1960∼80년대 미국 연방하원의원으로서 한국의 오랜 친구가 돼 주었던 이들을 24일 숙소인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호텔월드에서 만났다. 머피 전 의원은 딸 어맨다 씨, 가르시아 전 의원은 부인 제인 씨와 함께였다.》
존 머피 前의원
“과거는 반복되며 이어져
자녀들에게 역사공부 강조”

로버트 가르시아 前의원
“경제대국 성장한 한국 보면
보람있는 일 했다는 자부심”



―6·25전쟁에 참전한 시기와 근무 지역은 어디였나.

통신회사 방문한 참전용사 “원더풀” 6·25전쟁 참전용사인 존 머피(왼쪽), 로버트 가르시아 전 미국 하원의원이 24일 서울 중구 을지로 SK텔레콤 사옥 2층 모바일체험관 ‘티움(T.um)’을 찾아 영상통화를 시연해보고 있다. 가르시아 전 의원은 ‘두 분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 감사드린다’는 SK텔레콤 관계자의 인사에 “이렇게 발전한 당신들에게 우리가 고맙다. 우리에게 감사하지 말고 당신의 부모와 조부모에게 감사하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가르시아=열일곱 살 때 뉴욕시립대에 진학했지만 곧 군에 지원했다. 기본훈련을 마칠 때쯤 전쟁 소식을 들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도대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야’라는 것이었다. 1952년 1월 9일 인천에 도착했다. 미 육군 3사단 보병부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대부분은 임진강 부근에서 근무했다. 8개월 복무한 뒤 귀국했다.

▽머피=1950년 8월 부산항에 도착했다.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위로 참전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낙동강에 배치됐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뒤에는 인천과 낙동강 지역에서 동시에 북진 공격을 펼쳤다. 내가 소속된 2사단은 평양에 처음으로 도착한 부대였다.

―6·25전쟁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인가.

▽가르시아=몇 년 전 서울에서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다. 16개 참전국 노병들이 모인 행사에서 4인용 테이블이 세팅돼 있었지만 내내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희생의 상징물이었다. 이런 희생 덕분에 오늘날의 한국이 가능했다. 한국이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6·25전쟁 속의 많은 희생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전쟁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제인=전쟁을 통해 남편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18세 소년이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예민한 시기를 한국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남편은 정서적으로 한국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한국에 대한 글과 책을 늘 읽었고, 지역구민과 워싱턴 정치인에게 늘 한국 이야기를 꺼냈다.

군인이 된 가르시아 전 의원의 손자는 몇 주 뒤면 주한미군으로 배치된다고 했다. 가르시아 전 의원 부부는 “손자에게 참 감사한 일이라고 했고,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진 뒤에도 ‘드문 경험을 하게 될 테니 축복이라고 생각하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한국의 변화가 놀랍다고 한다.

▽가르시아=호텔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와우’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국인은 잘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머피=서울을 방문하면 도심의 호텔 방에서 눈에 띄는 건설현장의 크레인 개수를 세는 습관이 생겼다. 예외 없이 15개 이상은 보였다. 뉴욕에 돌아가 보니 네댓 개뿐이었다. 서울은 늘 힘차고 활동적인 곳이 됐다.

―동아일보가 올해 만난 16개 참전국 노병들은 한결같이 ‘한국이 나라를 지켜준 것을 매우 고마워한다는 점에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가르시아=10년 전에도 그렇고 이번 방한 때도 그렇다. 어제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시민들이 연방 우리에게 ‘생큐’를 연발했다. 사진도 여러 번 같이 찍었다. ‘내가 누구이기에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대단한 현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구원해준) 프랑스인을 만나면 절대 느낄 수 없는 반응이다.

―자녀와 손자들에겐 전쟁 경험을 어떻게 설명했고 그들이 무엇을 배우길 바라나.

▽머피=‘과거를 공부하라’고 했다. 과거는 반복되며 계속 이어진다. 과거를 공부하지 않는 이들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번에 같이 온 막내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60년 전 공산화를 막기 위해 싸웠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다. 최근엔 천안함 사건도 발생했다.

▽가르시아=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유럽은 너무 달라졌다. 철저한 낙관주의자인 나는 북한이 절대로 중세시대와 같은 과거에 묻힌 채 그대로 갈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내 생애에 통일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난 한반도 통일 이후 북한이 달라질 모습을 상상하면 늘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온다.

▽머피=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미국 미주리 주의 작은 대학에서 이른바 ‘철의 장막’ 연설을 했다. ‘죽의 장막’이라는 말이 있는데, 북한에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 한반도 분단은 중국이 북한을 부추긴 측면이 크다.

▽가르시아=천안함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북한의 만행은 규탄받아야 한다. 한국 사회 내부의 이견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견은 60년 전 한국과 미국이 함께 꿈꾸며 만든 자유세계의 징표 아니냐. 동조하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겠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존 머피 전 미국 하원의원(84)

18세 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종전 후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졸업. 2사단 9보병연대 정보장교(중위)로 6·25전쟁 참전. 1963년 뉴욕 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16년 동안 8선.
로버트 가르시아 전 미국 하원의원(77)

19세 때 6·25전쟁에 참전해 8개월 동안 복무. 3사단 소속 통신병으로 주로 임진강 지역에서 근무. 대학 졸업 후 시의원 생활. 1978년 뉴욕 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돼 12년 동안 6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