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김길상 그림 제공 포털아트
오늘의 안목에서 보자면 진부한 불륜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플로베르는 이 통속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형식에 대한 절대적인 추구를 통해 걸작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53개월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공중도덕에 악영향을 미치고 종교를 모독하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에마 보바리의 행실을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 철학자 쥘 고티에는 저 유명한 ‘보바리즘(Bovar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 다시 말해 자신을 다른 존재로 착각하는 상상과잉 증세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에마 보바리는 보바리즘에 의해 희귀하고 특수한 존재, 정신적으로 병적인 징후를 보이는 문제적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한때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미유죄 유미무죄(無美有罪 有美無罪)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몸에다 보톡스 콜라겐 실리콘을 삽입하고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성형중독’이라는 병적 증세까지 생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살을 빼려다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기혼여성의 35%가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말하고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율은 50%를 넘지 못합니다. 마담 보바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이 모든 사회적 징후는 ‘보바리즘’이라는 언어의 효용성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사회적 징후가 의미하는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자신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증세, 다시 말해 자신을 외면하려는 이중인격적 욕망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외면한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담 보바리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도 결국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본질을 바꿔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생에 걸친 정신적 노력뿐입니다. 요컨대 외형만으로 내용까지 바꿀 수 없습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걸작인 이유는 내용이 곧 형식이 되고, 형식이 곧 내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하자면 ‘황금의 표지에 황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감동을 주는 책, 감동을 주는 사람, 다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