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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2모작]국책연구소 부원장 지낸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 원장

입력 | 2010-06-29 03:00:00

“대형연구소가 눈길 안주던 틈새분야 도전 한눈 팔 틈 없어”




정필수 원장(왼쪽)이 24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있는 한국종합물류연구원에서 연구원 한 명과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정 원장은 일주일에 2, 3차례 발주처 관계자들과 회의하고 한 달에 2, 3차례는 현장을 답사한다. 성남=김재명 기자

《직장생활 내내 한두 가지 업무만 하다 보면 퇴직 이후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술과 의지를 갖추기 어렵다. 특히 전문직 종사자들은 조직의 구성원으로 정해진 일을 잘해내면 자신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직장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점을 금세 깨닫게 된다. 이는 상당수 전문직 직장인이 후반기 인생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GLORI) 원장(63)은 국책연구소에서 연구하던 분야를 소규모 연구원을 차려 계속 수행함으로써 이모작에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에 해당한다.》

○ 항상 새로운 분야 개척

정 원장은 젊은 시절 한때 고시를 치러 공무원이 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공무원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해 대학원 졸업 후 은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최고의 직장이라고 말하던 은행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77년 국제경제연구원(현 산업연구원)이 생겼을 때 설립 멤버로 합류해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연구원에서 중남미 지역연구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1980년 해외유학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그는 주저 없이 멕시코를 선택했다. 모든 유학생이 미국행을 택했을 때였으니 천진난만하다는 얘기를 들을 만했다. 그는 당시 연구원장이 “‘멕시코에 가서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극구 만류했다”며 “현지 사정도 모르면서 어떻게 지역연구를 하느냐며 우기고 우겨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제3세계의 중심이었던 국립 멕시코대에는 그가 공부하고 싶은 강좌가 없었다. 1년간 자본론을 5차례 읽고 난 뒤 ‘정부 돈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도중하차했다.

 

“2003년 퇴직후 외식업 渡美… 비록 재미 못봤지만
서비스 마인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건졌죠”


귀국한 지 1년 만인 1982년 그는 연구원에 사표를 내고 자비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6년간 공부한 끝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해운산업연구원(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으로부터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그는 1년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원에 들어와 남들이 다루지 않던 분야를 찾았다. 곧 물류분야 연구에 착수해 국내 최초의 물류세미나를 여는 등 개척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새 분야의 재미에 빠져 지내다 보니 처음 계획과는 달리 선임연구위원, 부원장, 원장직무대행까지 지냈다.

○ 서비스정신을 연구에 접목

2003년 56세로 연구원을 떠나게 된 그는 앞날이 불투명했다. 마지막까지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그로서는 ‘조기에 은퇴한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때마침 미국에서 외식사업을 하던 선배로부터 ‘사업을 확장하려는데 같이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그는 또 다른 도전이라고 판단하고 선뜻 나섰다.

그러나 막상 외식사업 일선에서 일한 경험은 “돈 버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뼛속까지 스며들게 했다. 그동안의 연구 활동은 외식사업 부사장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철저한 서비스정신으로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배겨낼 수 없었다. 그는 20개월 만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수확도 있었다. 미국 시절 익힌 비즈니스 마인드를 정책연구에 덧붙이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형 연구소들이 다루지 않는 틈새 분야에 특화한 연구소를 세우고 철저한 서비스정신으로 고객만족을 해나가겠다는 구상이었다. 2004년 귀국길에 미국 시애틀에 들렀을 때 오랫동안 사귀었던 미국인 교수로부터 “네가 연구 분야를 떠나는 것은 한국의 큰 손실”이라는 격려를 듣고 자신감도 얻었다.

그는 2005년 GLORI를 설립했다. 연구원 초기 당시 해양수산부에서 항만물류에 관한 연구용역 보고서를 5개월 만에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시한을 맞출 수 없는 용역이었지만 영국의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OSC(Ocean Shipping Consulting Co.)를 직접 방문해 1주일을 설득한 끝에 공동연구 보고서를 제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용역건수가 늘어나면서 연구원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해양수산부가 국토해양부로 통합된 뒤 정부가 발주하는 용역이 뚝 끊기면서 큰 위기가 닥쳤다. 이 원장은 “길게 보지 않았다면 연구원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지방자치단체를 찾아다니며 프로젝트를 따내 위기를 헤쳐 나갔다. 1년 정도가 지나자 국토부도 다시 용역을 발주하기 시작했다.

현재 GLORI에서는 박사급 연구원 6명이 1년에 평균 6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토부로부터 5년의 장기 프로젝트를 수주하기도 했다. 그는 “발주처의 젊은 직원들을 대할 때도 투철한 서비스정신을 앞세운다”며 “전문직 종사자들은 나이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 분야를 계속 갈고닦는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강창희 소장의 한마디

대기업 출신 간부가 퇴직 후 부품제조업체를 설립하는 것처럼 정필수 원장은 국책연구원의 고위직으로 일하다가 독립 연구원을 세워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퇴직 후 2년 가까이 미국 외식업체에서 일하면서 철저한 서비스정신으로 스스로를 낮추는 요령을 배웠고 국책연구원 관리직에 있으면서도 연구를 쉬지 않았던 점이 성공요인이다. 그의 자산은 자택과 장래 연구원 용지로 서울 근교에 마련한 약간의 땅이 전부라고 한다. 부동산 비율이 100%에 가깝다. 앞으로 생기는 여유자금은 금융상품에 투자해 금융자산의 비중을 높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