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교수의 외로운 장인
1994년부터 평양의 가족과 기적처럼 편지 상봉이 시작됐다. 가족들이 살아남았고 아오지 탄광에도 끌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장인은 혈육을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각종 선물을 한 트럭도 넘게 북한으로 보냈다. 돈도 수십 차례 보냈다. 그러나 장인은 끝내 혈육을 만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의 한(恨)을 단물을 빨아먹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장인을 괴롭혔다.
덩컨은 한국의 처절한 민주화 과정도 체험했다. 1960년대 말 미군 병사로 한국에서 복무한 그는 제대 후 고려대에 입학해 한국사를 공부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에 군이 진주한 어느 날 김모 교수가 특별한 부탁을 했다. 교수실에 있는 ‘민주화 선언문’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군인들이 선언문을 발견하게 되면 나와 서명 교수들이 모두 체포될 것”이라며 “미국인인 자네는 학교 출입이 가능할 것 같아 부탁한다”고 했다. 겁이 났지만 정문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교실에 책을 두고 왔다고 둘러대고 학교로 들어갔다. 교수실에서 선언문을 발견한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문건을 들고 나오고 싶었지만 몸수색에 걸리면 김 교수도, 서명한 다른 교수들도, 자신도 고초를 겪을 것이 뻔했다. 고민 끝에 선언문을 불태우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는 1972년 고려대를 졸업했다. 한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 역사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현재 UCLA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을 속속들이 아는 그이기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된 아내의 나라, 독재의 굴레를 벗고 민주화를 이룩한 장인의 나라가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6·25는 아직도 그에게 고통과 슬픔으로 남아있다.
6·25의 클라이맥스는 평화통일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이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 존 틸럴리 전 한미연합사령관도 참석했다. 필자가 16개 참전국 방문 시리즈를 비롯한 동아일보의 6·25 관련 보도에 대해 소개하자 그는 “6·25의 클라이맥스는 반드시 한국의 평화적 통일이 돼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