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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공동성명 화해 제스처 뒤엔 北 ‘주한미군 철수’ 노림수 있었다

입력 | 2010-07-03 03:00:00

■ 舊동독 외교문서 입수
“남침 않겠다 했는데 왜 계속 주둔”
김일성, 불가리아 총리에 불평




우드로윌슨센터와 북한대학원대가 발굴한 옛 동독 외교문서 4건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38년 전인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한 뒤 평화공세를 펴다 1년 만에 남북대화를 중단한 이유가 드러나 있다. 남북관계는 7·4남북공동성명 다음 해인 1973년 3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를 기점으로 교착 국면에 들어섰다. 북한은 그해 8월 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명분으로 남북 대화를 단절했다.

김 주석은 1973년 7월 16일 주북한 헝가리대사와의 대화에서 “박정희는 남북대화를 오직 자유사상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북에 전파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1975년 6월 2∼5일 불가리아 토도르 지프코프 당시 총리에게는 “남조선 측이 두 개의 조선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평화적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에 불과했다. 김 주석은 지프코프 총리에게 “미국은 북측이 남측을 침략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하면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며 “북측이 그와 같은 선언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남조선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 국면에서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킨 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 대화를 중단한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김 주석은 또 평화공세를 펴면 남한 내 반(反)박정희 세력이 힘을 얻어 자체 혁명 역량이 강화될 것이라는 당초의 믿음에도 회의를 표시했다. 그는 지프코프 총리에게 “남한 민주통일당과 조국전선을 결성했지만 노동자, 농민과의 연대가 부족하고 통일혁명당 역시 당원이 3000명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한편 김 주석은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 대통령 시해 기도 사건과의 관련성을 철저히 부인했다. 그는 그해 10월 29일 주북한 소련참사관에게 “북은 어느 개인에 대한 테러에 반대한다”며 “문세광은 아마도 일본 민단의 좌파 계열에 속한 인물로 김대중의 지지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