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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악의없이 투명한 슬럼가의 일상들

입력 | 2010-07-03 03:00:00


◇백의 그림자/황정은 지음/196쪽·1만 원·민음사

첫 번째 장편 ‘백의 그림자’를 펴낸 소설가 황정은 씨. 모기가 말을 건다거나 사람이 오뚝이로 변하는 등 거두절미하면서도 정제된 환상성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이번 작품에도 이 같은 성향이 반영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소설가 황정은은 2007년 선보인 첫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로 단번에 주목받는 신인이 됐다. 이 젊은 작가가 펼쳐내는, 거두절미하면서도 정제된 환상성의 출현에 많은 이가 놀랐다. 이 작가의 특징은 ‘여백의 서사와 문체에 구현된 미니멀리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모기가 말을 건다거나 유령이 등장하고 사람이 오뚝이로 변해가는 비일상적인 사건이 그의 소설 속에서는 전후설명 없이 아주 태연하게,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일어난다. ‘뭐 이런 걸로 호들갑을 떨어?’라고 묻는 것처럼.

따옴표도 물음표도 없이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대화나 상식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연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전치·轉置)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엉뚱하고 낯선 조합이 만들어내는 신선한 환기효과다. 최근 그가 펴낸 첫 번째 장편 ‘백의 그림자’에도 지금까지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특징이 고스란히 종합돼 있다. 간결하게, 기이하게, 하지만 어딘지 가슴 서늘하게 감성의 한 구석을 툭, 건드린다.

도심의 낡은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가 소설의 주인공. 은교는 여 씨 아저씨의 수리실에서 심부름을 하며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으로 일한다. 서사는 느슨하게 이어진다. 여 씨 아저씨가 일하는 일상적인 풍경이 나오고, 은교와 무재는 만나 식사하며 뜬금없는 대화를 주고받거나 선술집에 함께 간 유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한다.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림자’와 관련된 것이다. 무재와 숲에 갔다 뭔가에 이끌려 한참을 쫓아 들어갔던 은교는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의 소설답다. 무재는 그 불가해한 일의 선후관계를 캐묻거나 당황하는 대신, 더없이 다정히 말한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주변 사람들은 알 만하다는 듯 ‘그림자가 자신을 앞질러 가거나, 스스로 자라고, 주변을 배회하다가 어느 날 일어서기도 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들은 그림자란 무서운 것이며,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 등장하는 이들은 흔히 사람들이 ‘슬럼’이라고 말하는 지역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다. 빚을 지면서까지 대학에 다니는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는 이들, 곧 철거될 전자상가 한 귀퉁이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이들,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 작가는 행간에 묻어나는 은근한 유머와 절제된 언어, 압축과 생략, 여백의 서사를 통해 외부세계의 비정함과 대비되는 이들의 악의 없이 투명한 일상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해낸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그림자’란 장치의 의미는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단순하게는 세계로부터의 소외감과 고독, 실존적 외로움 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 은유적 장치는 도식화된 해석의 틀 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은교는 무재의 그림자 역시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실체와 결말이 불분명한 그림자에 대한 은교의 막연한 두려움은 무재와의 교감으로 극복한다. 소설의 마지막, 여행 중 3만 원짜리 고물 중고차가 고장 나 길을 잃게 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어둠 속을 함께 걷는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이 짤막한 마지막 문장은 기대에 값하는 여운을 남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