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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뷰]명쾌한 스토리+강렬한 캐릭터의 조화

입력 | 2010-07-06 03:00:00

강우석 감독의 ‘이끼’ 15일 개봉

원작 갈등구조 잔가지 털어내
주제와 캐릭터에 새로운 해석

에너지 넘치는 배우연기 압권
‘비장의 카드’ 마지막에 숨겨놔




“제가 여기 머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걸 알면…. 감당할 수 있겠나?” 이방인 유해국(박해일·오른쪽)과 마을이장 천용덕(정재영)은 영화 ‘이끼’를 끌어가는 갈등의 두 축이다. 결말에 가까워지며 마을의 비밀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추악한 밑바닥이다. 사진 제공 이노기획

《"왜 하필 감독이 강우석이야?"

2009년 5월. 강우석 감독(50)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연재만화 '이끼'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강 감독이 (이끼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전한 댓글에 독자의 야유가 이어졌던 것. 만화 팬들은 대부분 '강 감독의 선 굵은 연출 스타일로 원작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살릴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단행본 1권을 본 뒤 영화 제작을 발표하고 각색을 맡은 정지우 감독과 함께 고민을 거듭하던 때였다. '어쩌다 이렇게 골치 아픈 일에 손을 댔을까' 가뜩이나 속상하던 참.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분했다. 어떤 장면에서도 '만화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고 말했다. 15일 개봉하는 '이끼'(18세 이상 관람가)의 모든 장면에는 한때 '충무로의 일인자'로 불렸던 강 감독의 절치부심이 녹아 있다.》

시나리오의 기본 얼개는 원작과 같다. 의절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외딴 시골마을에 찾아온 서울청년 유해국(박해일)이 마을이장 천용덕(정재영)을 중심으로 얽힌 추악한 범죄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 2008년 8월~2009년 7월 연재됐던 원작의 매력은 80회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은 인물간의 갈등 구도에 있었다. 페이지뷰 3600만을 넘긴 이 만화는 복잡한 은원(恩怨) 관계를 무채색 그림 위에 엮어내며 독자의 애간장을 태웠다. 스크린으로 옮겨간 이야기는 원작의 짜임새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강 감독이 덧붙인 것은 주제와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만화 '이끼'의 결말은 모호했다. 사소한 거리낌도 눈감고 넘어가지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의 해국이 일으킨 파란은 결국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다. 하지만 이야기의 발단이었던 해국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보다는 눈앞의 부조리에 대한 집요한 의심이 낳을 수 있는 의외의 긍정적 결과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했다.

범죄스릴러 영화 ‘이끼’를 연출한 강우석 감독은 “인간 본성의 선악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영화는 이런 결론을 털어내고 조연들의 마음 속 '죄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해국의 시점에서 도입부를 여는 원작과 달리 해국 아버지가 천용덕 등 마을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사연을 전진 배치했다. 처음부터 관객은 주연 박해일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정재영, 유해진 등 조연들의 움직임도 유심히 살피게 된다. 균형 있게 조율된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감독이 원작에서 짚어낸 '모든 사태의 원인'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강 감독은 "해국의 '잘못'이 뭐였을까. 마을사람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꾸 상기시키던 인물(아버지)과 꼭 닮은 얼굴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죄 짓게 만드는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죄의식을 자극하는 거다. 마음 고쳐먹고 열심히 살고 있는 전과5범한테 '아니, 어떻게 당신처럼 선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꾸 옛일 들춰봐라. 바로 6범 될 거다. '이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죄의식을 건드린 데 대한 반작용의 산물이다."

에너지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 경합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크다. 원작자 윤태호는 "연재 중 유해국의 이미지가 고민될 때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며 박해일이 연기한 대학원생 캐릭터를 참고했다"고 했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보이는 박해일은 "그런 말 때문에 더 부담스러웠다"며 "선배들의 '센 연기'에 눌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유해국은 그래서 더 박해일과 쉽게 겹쳐진다. 극 후반 4분여의 단독 컷 연기를 한번에 뽑아낸 동네 청년 덕천 역의 유해진도 인상적이다.

강 감독은 비장의 카드를 마지막에 숨겨뒀다. 원작에 없었던, 그러나 원작을 연구해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뽑아낸 유추의 산물이다. 라스트신에 대한 정보에 가급적 귀를 막고 영화관에 가는 편이 좋다. 어렴풋한 힌트가 될 대사는 이거다. "네가 피해자인 줄만 알지? 가해자일 수도 있어."

 

◆ 강우석 감독 인터뷰

30일 서울 중구 주자동 시네마서비스에서 강우석 감독 인터뷰

-미장센(장면 구성)이 돋보인다. 인물들을 스크린 한가운데 던져놓다시피 하고 죽 이어지는 액션을 통해 스토리를 풀어가던 '투캅스'나 '공공의 적' 같은 전작들과 대조적이다. '그 영화 만들었던 감독 작품이 맞나' 싶기까지 하다.
"어떤 장면에서도 '만화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각오였다. 만화의 이미지가, 그림이 워낙 좋다. 독자들이 '영화는 왜 이렇게 그림이 빈약해' 할까봐 애가 탔다. 미장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 드라마의 힘은 만화보다 좀더 강렬하고 자연스러우면 좋겠다 싶었다. 만화는 스토리에서 어느 정도는 비약을 해도 '만화니까' 용납이 되지만, 영화는 그렇게 안 된다. 이런저런 강박 때문에 나는 괴로웠어도 관객이 보기에는 어느 정도 편해지지 않았나 싶다. 장면 길이는 의식적으로 길게 잡았다. '깊이 있다'는 호평을 들은 만화의 그림에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전북 무주군 6만6000㎡ 용지에 20억 원을 들여 마을 세트를 만들었다. 최대한 완벽하게 세팅해놓고 '그래 한 번 해 보자!' 하며 싸움하듯 찍었다. 이제 다시는 만화 안 볼 거다. 내가 또 영화로 만든다고 할까봐 겁난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정말 몰랐다. 이야기의 매력에 혹해서 오케이 했지만 그 뒤로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만화연재 인터넷 사이트에 가봤는데 반응이 순…. '왜 하필 감독이 강우석이냐'는 맹비난 일색이었다. 하하."

-'투캅스'나 '공공의 적' 같은 단선적 권선징악 이야기가 아니다. 만들면서 스스로 낯설지 않았나.
"올해 쉰이다. 두툼한 얘기를 차분하게 나누고 싶어진 게 당연한 나이다. 웃고 즐기는 단순한 이야기보다는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서 찬찬히 복기해 볼 수 있는, 묵직한 스토리 텔링에 대한 갈증이 컸다."

-시나리오 각색 작업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소문에는 정지우 감독이 작업 도중 손을 뗐다던데….
"너무 어려웠다. 각색 시작하고 작업 초반에는 진짜 많이 후회했다. '내가 이 어려운 걸 왜 한다고 했지' 하고. 만화에서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다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 영화에 그걸 다 담을 수 있나. 무조건 덜어내야지. 작은 요소 하나를 덜어낼 때마다 전체 기승전결을 다시 배치해야 한다. 독자들 관심은 계속 부담으로 마음에 얹혀져 있고…. 없던 얘기 새로 만들어내는 게 훨씬 쉽다. 정 감독은 탈고 후 수정 과정에서 손을 놨다. 홍일점인 영지(유선)와 마을토박이 덕천(유해진)의 역할 변경에 대한 의견이 안 맞았다. 나는 내가 영화로 잘 뽑아낼 수 있는 스타일을 잘 안다. 그래서 바꾸려 했다. 정 감독은 '만화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떠났다. 제작 마무리하고 다시 만났다. '애쓰셨다'고 말해주더라. 뒤에서 툴툴거리는지는…. 글쎄, 모르지."(웃음)

-원작과 다른 방향의 결말을 내놓는 데 대한 부담은 없었나.
"내가 영화 만드는 게 처음이 아니지 않나. 인물 구성이 이러저러하니 나름의 결론을 낼 수 있겠다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만화 이야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자꾸 거창해지는 거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론은 내 식으로 가겠다'고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들쑤셔진 죄의식에 의한 반작용의 무시무시함'에 주목한 감독의 시선이 두드러지던데.
"원작자와 상의하고 내 나름의 방점을 둔 부분이다. 사람을 죄 짓게 만드는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죄의식을 건드리는 거다. 마음 고쳐먹은 뒤 열심히 살고 있는 전과5범한테 가서 '아니, 어떻게 당신처럼 선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꾸 자극해 봐라. 바로 6범 될 거다. '이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죄의식을 건드린 데 대한 반작용의 산물이다."

-선한 말로 타인을 계도하려 하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아닌가.
"맞다. 사람은 착할까, 나쁠까? 나는 어느 쪽도 아니라고 본다. 살면서 '이야, 나 정말 나쁜 놈이구나' 할 때가 많다. 그런 자의식이 열등의식, 질투 같은 나쁜 마음을 덮고 있을 뿐이다. 또 그걸 자각했다고 해서 '나는 그럭저럭 선한 편'이라는 식으로 자족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여러 가지 면이 있음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선과 악을 딱 갈라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웃기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마을토박이 중 한 명인 석만(김상호)는 사람을 송곳으로 찔러 죽이려 하는 불한당이지만 밤마다 원고지에 어머니 그리는 글을 절절히 써내려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게 인간 아닐까. 그냥 '착하게 살자'라고 자꾸 다짐하면 사는 거지, 누구는 착한 사람이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게 아닌 것 같다. 인간 본성의 선악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중반에 '이끼처럼 살라'는 대사가 나온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게 좋을 텐데, 다들 너무 드러내놓고 사는 세상 같다. '까불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검사의 얘기에도 시사성이 있지 않나 싶다. 요즘은 생존하려면 튀어야 하니까, 그렇게 살기 어려운 세상이긴 하다."

-정재영 유해진 등 '강우석의 남자들'이라 할만한 익숙한 배우들도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촬영 전에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부탁했다. '다르게 한번 해 보겠다'는 식의 부탁을 하지 말라고 미리 말했다. 70대 노인 역을 맡은 정재영은 촬영 날마다 3시간씩 분장을 했다. 두터운 분장만큼 표정 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냥 노인 한 분이 오신 것 같았다. 현장에서는 카메라 돌 때 말고는 말 한 마디 않고 구부정하게 앉아만 있더라. 영화 후반 나오는 유해진의 4분여 단독 컷은 단 한 번에 오케이를 냈다. 더없이 흡족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한 번 더 갔는데 역시 그만큼은 안 나왔다. 처음 촬영에 그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것 같았다."

-벌써 다음 영화 작업에 착수했다고 들었다.
"'이끼'를 완성하고 나니까 신인 때처럼 막 힘이 난다. '보고 나서 마음 따뜻해지는 휴먼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다퉈서 서먹해진 부부가 같이 보며 울고 웃다가 극장 밖으로 나가면서 손 꼭 잡게 만드는 영화. 그런 모습 보고 싶어서 영화 만든다. 시나리오 작업 중인 차기작 '글러브'가 바로 그런 영화다. 청각장애인과 야구라는 소재를 조합했다."

-출세작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부터 21년이 흘렀다. 감독, 제작, 배급 등 다 합치면 130여 편 정도에 관여했다고 들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외롭지 않나.
"외롭다. 동년배나 기댈 선배가 없다. 시야를 세계로 넓히면 나는 정말 젊은 감독이다. 한창 방방 뛰어야 할 나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진작부터 맏형 노릇만 하고 있다. 인력 층이 두꺼워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요즘은 '인생'을 얘기하는 영화가 거의 없다. 관록과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국 영화에서 맛보는 일이 갈수록 드물어진다. 즉흥적 사건과 반짝이는 재치만 넘친다. 아쉽다."

-낙(樂)이라든가…, 힘들 때 무엇에 기대나.
"그래도 힘이 되는 건 사람뿐이다. 나랑 놀아주고, 대화를 나눠주는 영화인들."

-해외 영화제에서 상 받는 후배들 볼 때 기분이 어떤가.
"사람 많은 공식석상에 정장 차려 입고 가는 걸 도통 못 한다. 파티? 질색이다. 친한 사람들이랑 둘러앉아서 시끌벅적 술 마시는 거야 좋아하지. 언젠가 국내 영화상 후보가 됐다가 상 준다는데 시상식 날 저녁까지 안 간다고 버티다가 미안한 마음에 뒤늦게 뛰어간 적이 있다. 양복 입고 무대 올라가서 마이크 잡는 것도 싫다. 국내 영화제에서 이제 아무도 나를 안 부른다. 하도 안 가니까. 어쩌겠나, 나는 현장에서 일하는 것만 좋은데. 그게 내 역할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진출 얘기가 오갔을 때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게 귀찮고 싫어서 관두겠다고 그냥 들어와 버렸다. 요즘은 감독도 연예인 기질이 있어야 한다지만, 나는 낯선 사람 앞에서는 거의 한 마디도 못 한다. 그래서 처음 보면 내가 과묵한 줄 아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래도 외국 진출 기회가 있었을 때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았겠나.
"야구 잘 하면 다 메이저리그 가야 되나. 그러면 한국 프로야구는 무슨 재미로 보겠나. 해외 영화제? 닭살 돋는다. 나는 상 주는 사람보다 영화 재미있다며 돈 주고 사가는 사람이 좋다.(웃음) 내 무대는 한국이고 내 영화의 주빈(主賓)은 한국 사람들이다. 그럭저럭 잘 만들면 돈 내고 시간 내 봐주면서 가끔 박수까지 쳐 준다. 관객이 나 밥 먹고 술 사먹으라고 돈 주는 게 아니잖나. 이번에 꽤 괜찮았으니 다음에 더 재미있는 영화 만들라는 것이지."

-멜로처럼 전에 안 해본 장르에 도전해 볼 생각은 없나.
"멜로? 나는 삶이 코미디다. 연애도 결혼생활도 늘 코미디였다. 요즘도 출근할 때 한번이라도 아내를 웃기고 나와야 속이 편하다. 애틋한 이벤트? 해 본 적 없다. 눈만 뜨면 마누라 웃기는 게 집에 있을 때 내 유일한 낙이다. 그런 사람이 멜로를 만들어 봐라. 얼마나 어색하겠나. 나는 내 스타일로 '다른 이야기'를 계속 만들 거다."

-필생의 역작이라 할 만한,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꿈이 있다면.
"한국 정치 풍자 코미디를 만드는 거다. 라디오 드라마처럼 케케묵은 옛날얘기 하자는 게 아니다. 21세기 오늘의 이 나라 정당정치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제는 그런 거 만든다고 어디서 스윽 잡아가지는 않을 테니까.(웃음) 솜씨 좋은 시나리오 작가를 찾는 중이다. 풍자코미디의 '끝'이 거기에 있지 않겠나 싶다. 인간 강우석의 꿈은 언제까지든 어떤 상황에서든 '구차하지 않게' 사는 거다. '네 아버지가 강우석이야?'라는 문장에는 속뜻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가지 뉘앙스가 붙을 수 있다. 내 자식들이 나중에 그런 말을 굉장히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 하고 싶다. 그런 꿈 덕에, 외롭고 힘들지만, 행복하다."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영화 '이끼'에 출연한 배우 박해일씨 인터뷰


◆ 주연 박해일 인터뷰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영화 '이끼'에 출연한 배우 박해일씨 인터뷰

-원작은 처음에 어떻게 접했나.
"메일 체크하다가 재미있다는 얘기 보고 무심코 들어가 읽었다.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지만 나와 상관없는 얘기로 알았다. 어느 날 정지우 감독님이 밥 먹자고 불러내서 홍대 앞에 가봤더니 윤태호 작가가 와 있었다. '주인공 유해국 캐릭터가 모호해질 때 '질투는 나의 힘'에서 내가 연기했던 대학원생 이원상 캐릭터를 가끔 참고했다' 하더라.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를 받고 나서 얼마 뒤에 강우석 감독님이 같이 하자는 전화를 주셨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만화가의 말이 오히려 부담이 됐겠다.
"맞다. 캐릭터랑 닮은 점이 많으면 좋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반대다. 원작은 원작이고 영화는 감독의 것이다. 배우는 그 중간에 놓인다. 감독님 말에 더욱 귀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강 감독님이 '자기를 따라오라' 했고 그게 맞을 거라 판단했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간 뒤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고심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으니까. 잠도 못 주무시면서 고군분투했다. 그런 상황에서 배우가 연기 방향에 대해 개입하는 것은 혼란만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이렇게 합시다' 하면 그 방향에 맞춰서 어떻게 덩어리를 만들어 나갈지, 어떻게 디테일을 덧붙일지 배우들의 고민이 따라왔다. 촬영 전날에는 가끔 의논이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잡음 없이 굴러갔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연기하기가 힘들지 않았나.
"해국은 관객의 시선을 대신해 마을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선배들과 감독님의 에너지에 파묻히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대립 구도를 유지하면서 너무 튀지도 말아야 했다. 현장에서 주로 얘기한 것이 '강도 조절'이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맞서 싸웠다는 게 아니라 '나'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는 얘기다."

-그동안 순수한 청년('인어공주'), 바람둥이('연애의 목적'), 수수께끼의 살인용의자('살인의 추억')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본인의 실제 성격과 가까운가.
"어느 쪽도 나와 비슷할 수 있고 어느 쪽도 나와 다를 수 있다. 이번 영화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돋보기를 얻은 것 같다. 하나라고 단정해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출연작 흥행 성적이 들쑥날쑥하다. 슬슬 책임감을 느끼지 않나.
"작품 선택은 전적으로 내 의지로 한다. 그래서 후회는 전혀 없다. 타인의 뜻이 개입됐거나 상황에 휩쓸렸다면 후회가 남았겠지만. 머리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흥행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아직 그런 책임감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한번쯤 해보고 싶은, 욕심나는 캐릭터가 있다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일본 영화 '안경'을 좋아한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을 무대로 소박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 영화에 출연 제안이 온다면 당연히 오케이일 거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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