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칸막이 없는 신기술 연구 신세대 소프트웨어 창의성 기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현직생활보다 주시하는 눈이 별로 없어 자유로웠던 지난 1년간이 내겐 더 값졌다.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련기간 같았다. 미래 한국의 성장동력이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나를 계속 괴롭혔다. 거대한 힘에 이끌리듯 미국 동부로 날아갔다. 2009년 5월부터 약 한 달간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기술 연구현장을 치밀하게 둘러보면서 50여 명의 세계적 석학들을 만나 미래 기술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 대표기업의 CTO를 지낸 사람이고, 현장에서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했고, 신기술의 중심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고 자부해 왔는데…. 경영혁신의 대석학을 만나고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학제(學際) 간 연구현장을 보는 순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갈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우리의 ‘칸막이 식’ 연구개발 관행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간극이 거대한 쇳덩이처럼 나를 눌렀다.
객지생활의 여독과 장거리 비행으로 온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예민한 각성 상태가 지속됐다. 아무리 고단해도 이번만큼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호사를 허락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2년 전 전쟁터와도 같은 반도체에서의 생활을 거쳐 기업 CTO 격인 기술총괄 사장의 신분으로 현직을 마무리 지으면서 직원들에게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연구소는 예측할 수 없는 제품을 꿈꾸고 만드는 곳입니다. 연구원들은 꿈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성을 쌓지 말고,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항상 관심을 가지면서 신(新)시장 창조에 매진해야 합니다.”
현장공부가 거듭되면서 연구개발(R&D) 혁신과 방향에 대한 생각은 확고해졌다. 사업의 공간과 품목, 그리고 소비자 니즈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는 현실에서 우리만의 독창적인 제품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어떻게 국내 자원으로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부족한 기술을 현존 세계 최고 기술로 보완하는 ‘개방혁신(Open Innovation)’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한국에서 개발한 기술이라야 우리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이제는 깰 때다.
일개 기업도 아닌 국가가 ‘리스크 테이킹’에 나서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나 역시 간혹 더 안전한 길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지금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저만치 앞서 가는 선진국들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요즘 내 손을 떠나지 않는 글이 하나 있다. 제갈량의 후출사표(後出師表)다. 지혜롭기로는 천하 으뜸인 제갈량이 상식적으로는 계산이 나오지 않는 북벌(北伐)을 강행한 것도 리스크 테이킹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고작 13척의 배로 백수십 척의 왜군을 무찌른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則生) 정신 역시 다르지 않다.
이 땅의 모든 연구 개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제 분명해졌다. 우리가 지금 잘하고 있는 주력 산업 및 IT 산업을 근간으로 한 우리만의 독창적인 ‘온리 원(Only One) 융복합 기술’, 우리 세대가 만든 하드웨어적 과학기술에 신세대의 소프트웨어적 창의성을 잘 버무려 만든 신개념의 기술만이 10년 안에 우리를 세계 5대 기술 강국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좀 늦었지만 결코 크게 늦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