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정 : 러시아 마고차(6월15일)-치타(6월16~18일)
치타에 도착한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파손된 모터사이클을 수리하느라 잡아먹은 시간을 벌충하려고 이틀 연이어 700km를 달렸다. 새벽 일찍 마고차를 출발해 오전부터 너무나 졸렸다. 길가에 눕자마자 5분 만에 꿈을 꿀 정도로 깊은 잠을 잤다.
치타에 도착해 자미라의 도움으로 숙소를 잡는 동안 만나게 된 치타의 라이더들과 방에서 맥주 한 캔과 말린 생선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그러던 중 밝은 불빛에 상처를 보니 심상치 않았다. 왼쪽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은 상당히 부어 있었고 왼팔의 안쪽으로 붉은 줄 하나가 쭉 생긴 것을 보니 혈관염 아니면 임파선염이 생긴 모양이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만난 러시아인들
▶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어버린 팀닥터의 손가락
일단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봉와직염이다. 일단 항생제를 챙겨 먹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팀에 합류할 때 필자는 의사란 직업을 활용해 팀의 의학적 안전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에 두 가지를 준비했다. 사고로 급한 외상이 있을 경우 후송 전에 해줄 수 있는 것들과 내과적 질환이 생긴 경우 치료를 하고 팀원들의 목표인 완주를 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약이었다.
약을 준비하면서 어디까지 준비를 하고 내가 치료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신경 쓴 부분이 봉와직염이다. 장화나 장갑을 오래 끼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손과 발의 작은 상처는 장갑과 장화 안에 득실거리는 균들을 만나 봉와직염으로 진행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좀 더 진행되었다. 부종은 손을 넘어 팔뚝으로까지 진행되어 시계를 찰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행이 이곳에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어 사진을 찍어 학교병원 피부과 의사에게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다.
"봉와직염일 가능성이 높네요"라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았다.
일종의 텔레메디신(tele-medicine:원거리 의료행위)을 시현해본 것이다. "어떻게 치료할까?" "항생제 쓰고 손을 가능하면 쓰지 마셈" "내일 500km 운전해야하는데, 클러치를 100번은 잡았다 놨다해야해" "ㅠㅠ, 붓기 빠지는데 2주정도"….
휴대전화로 문자를 주고받은 후 고민했다. 일단 치료는 어제부터 시작했고, 필요한 약은 다 가지고 있다. 예정대로 내일 아침에 떠날지는 오늘 밤에 결정하자.
러시아 시베리아의 남동부 도시 치타
▶ "바이칼호를 못 봐도 좋으니 치료하고 갑시다"
"봉와직염이다. 치료는 하고 있지만 손이 부은 것 때문에 내일 출발하더라도 멀리는 못가고 천천히 가야한다. 그렇다고 내일 출발을 못하면 바이칼호수 보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몽골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봉와직염에 걸린 필자의 왼손
이미 내 손을 보고 있었으니 많이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바이칼을 못 봐도 좋으니 치료하고 갑시다."
"내일 병원을 가보는 것이 어때요?"
동료들이 주저하지 않고 바이칼을 포기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은 더 부어 있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의 표피에서는 압력에 못 이겨 진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모두 전혀 굽힐 수가 없었다. 팀원들은 병원을 가보라고 권했다. 주치의에게 병원을 가보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걱정이 되었나보다.
내심 러시아 병원구경을 구경하고 싶어 자미라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러시아에서는 의사와 선생이 가장 돈을 못 버는 직업이란다. 그래서인지 자미라는 여기 의사가 늘 화난 표정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의사는 내 팔을 보더니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혈액검사기기와 소변검사기기는 주변에 없었다. 한 명의 병리기사가 혈액을 슬라이드에 묻혀 현미경으로 혈구의 숫자를 세고 있을 뿐이었다.
흡사 1970년대 우리나라 병원 같았다. 다행히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결과는 정상이다. 어제 처치한 항생제가 제대로 작동한 것 같다. 의사는 내게 5일 동안 매일 병원에 오라고 권유하며 그렇지 않다면 치료를 거부했다는 문서에 사인을 하고 나가라고 했다. 내일은 떠나야 하기에 그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바이칼을 포기하다
자미라의 도움으로 번역을 해보니 러시아 의사도 봉와직염이라고 진단하고 내가 먹던 것과 똑같은 약을 처방했다. 러시아는 병원치료가 무료란다. 외국인에게는 돈을 받지만 이 작은 도시에 외국인이 진료를 받는 경우가 흔치 않아 이를 위해 계산대를 따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 처방전으로 약국에 가서 만원을 내고 약을 받아 팀원들에게 갔다.
서둘러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 소변을 통한 독소의 배출이다. 체액 량을 늘려 신장으로 독소를 빼내야 한다. 즉 몸을 씻어내는 것이다. 병원에 가면 흔히 맞는 링거 주사의 효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는 정맥주사를 맞을 수가 없으니 먹어서 그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마트에서 사온 물 5L에 밥수저로 6개정도의 소금을 넣는다. 이러면 0.3% 소금물이다. 흡수되면 링게르(생리식염수) 1.6L를 맞은 효과가 있다. 마시기 위해 설탕을 넣는다. 달달한 맛이 날 정도까지 설탕을 넣은 후 들고 다니면서 계속 마셨다. 소변량은 급격하게 증가하여 하루 동안 10번 이상의 소변을 보았다.
그날 밤 팀원들이 "손 붓기가 많이 빠진 것 같다"고 축하했다. 실제 손가락을 움직이며 붓기가 빠지고 있음을 느꼈지만 문제는 내일 아침 검지와 중지를 구부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나를 위해 무려 3일을 치타에서 보낸 우리는 모두 남아공 월드컵 한국 대 아르헨티나 전을 봤다.
다음날 아침 붓기는 더욱더 많이 빠졌고, 무리 없이 라이딩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아니 다른 팀원이 봉와직염에 걸렸다면 어땠을까? 팀원들이 나와 내가 판단한 치료를 믿고 따라 줄까? 대답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팀원 한 명을 위해 그렇게들 고대했던 바이칼호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팀원들에게 너무도 고맙다.
출발부터 찰과상으로 시작된 부상은 손목 부상, 늑골 부상으로 모든 팀원들을 괴롭히고 있다. 체력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앞으로 더욱 신중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투로드팀-진행방향-치타
정리 = 정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