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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맛!] 애호박 숭숭… 그리워라, 어머니의 된장국

입력 | 2010-07-16 03:00:00

호박과 수박




‘노오란 호박꽃 옆에 노오란 오이꽃 귀엽다/호박꽃은 거지반 애호박을 맺지 못하지만/오이꽃은 깜냥대로 애오이를 낳는다/노오란 호박꽃 한 송이 한 송이/황소들의 목에 종으로 달아주면 좋겠다/노오란 오이꽃 한 송이 한 송이/소녀들의 머리핀 꽃으로 꽂아주면 좋겠다’
<박만진의 ‘오이꽃 예쁘다’에서>

호박꽃과 오이꽃은 노랗다. 수박꽃도 노랗다. 호박꽃은 넉넉하다. 오이꽃은 앙증맞다. 수박꽃은 둘을 섞어놓은 것 같다. 호박 수박 오이는 친척이다. 사촌쯤이나 될까. 모두 박과의 덩굴성 한해살이 채소다. 한자로 오이는 ‘과(瓜)’로 표시한다. 호박은 ‘남쪽에서 온 오이’라는 뜻으로 ‘남과(南瓜)’다. 수박은 ‘서과(西瓜)’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때부터 재배했으니 중국 사람들은 당연히 서쪽에서 들여왔을 것이다.

호박 수박 오이는 90% 이상이 물이다. ‘물텀벙 덩굴열매 삼형제’라고 할 수 있다. 성질이 하나같이 쿨하다. 차고 시원하다. 호박물은 슴슴하지만 향긋하다. 수박물은 꿀처럼 달다. 오이물은 차고 풋풋하다. 모두 한여름 타는 목마름에 안성맞춤이다.

호박은 농약이나 비료를 쓸 필요가 없다. 씨를 심을 때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곳에 뒷간의 잘 삭은 똥을 넣어 흙으로 덮어주면 된다. 그 다음은 호박씨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 절대 ‘호박씨 까는 일’은 없다. 그 조그만 떡잎이 자라서 덩굴손을 뻗어 탱자나무울타리를 기어오른다. 훌쩍 높은 시멘트 담벼락도 끈질기게 타고 넘는다. 아파트 안에서 키우는 호박꽃은 그냥 피자마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벌 나비가 날지 않아 암꽃과 수꽃이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호박도 열리지 않는다.

호박은 못 먹는 것이 없다. 호박잎, 애호박, 늙은 호박, 호박씨 모두 먹는다. 우선 밥물에 살짝 찐 호박잎은 얼마나 맛있는가. 그 호박잎에 김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쌈해서 먹으면 또 어떤가. 입 안에 걸리는 호박잎의 꺼끌꺼끌함. 강된장의 구수한 틈새로 스며 나오는 연한 풋맛. 밥물과 버무려진 호박잎의 그 담담하고 오묘한 맛. 요즘 같은 전기밥솥 시대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호박잎은 음식 보자기이기도 하다. 옛날 아버지들은 울타리의 넓적한 호박잎을 뚝 따서, 동네 잔칫집의 떡도 싸오고, 돼지고기도 싸왔다. 시장에선 꽁치 두어 마리, 조기 한두 마리도 호박잎에 싸왔다. 시냇가 천렵 땐 고추장 된장을 호박잎에 싸 가기도 했다.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던’(백석 시인) 것이다. 하기야 요즘 랩이나 비닐에 싼 ‘멋대가리 없는 음식’이 어디 범접이나 할 수 있을까.

호박잎은 어른 손바닥만 하다. 아버지 손바닥처럼 뭉툭하고 두껍다. 투박하지만 믿음직스럽다. 후드둑! 빗방울이 호박잎에 듣는 소리도 무뚝뚝하다. 똑 또그르르! 방울져 흐르는 토란잎이나 연잎 위 빗방울과 다르다. 호박잎은 그저 대책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 빗물은 부서져 떨어진다. 그래도 호박잎은 다시 얼굴을 들이밀며 비를 맞는다.

‘쭈글쭈글 호박꽃이/동글동글 아기 낳고/동글동글 아기가/덩글덩글 자라서/덩글덩글 호박덩이/엉덩이가 무거워/땅바닥에 넙적!/주저앉았다’  <김미희 동시 ‘호박’ 전문>

 

7월 애호박엔 단물이 쩍쩍 오른다. 겉이 야들야들 윤기가 자르르하다. 그걸 기름에 볶아 먹으면 고소하고 들큰하다. 계란과 밀가루로 부친 애호박전도 기가 막히다. 가운데 노란 달걀에 가장자리 연초록 애호박 테는 섹시하면서도 우아하다. 약간 설익은 듯, 서걱거리면서도 새콤한 동글납작 애호박전. 조선간장에 살짝 찍어먹으면 혀끝이 아득해진다.

애호박 숭숭 썰어 넣고 고구마순, 호박잎에 된장 고추장 풀면 애호박된장국이다. 양념으로 매운 풋고추에 멸치 좀 넣으면 끝이다. 칼칼하고도 구수한 맛. 물컹하면서도 온갖 맛이 밴 애호박 맛이 황홀하다. 애호박을 채 썰어 넣은 애호박수제비국도 빼놓을 수 없다. 하얀 밀가루에 연초록 애호박의 어우러짐이 보기만 해도 컬러풀하다. 수제비국 맛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장마철 입맛 없을 땐 애호박 새우젓국이 으뜸이다. 애호박, 새우젓, 두부를 넣고 끓이다가 다진마늘 청양고추 등 양념을 넣으면 된다. 애호박이 새우젓의 비린내를 흡수해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목구멍에 걸리는 칼칼한 맛도 일품이다.

애호박은 그냥 오래 두면 끈적거리는 진액이 나오고 물러지기 십상이다. 남은 애호박은 물기를 없앤 뒤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한다.

호박꽃도 꽃인가. 그렇다. 꽃이다. 호박꽃은 커다란 통꽃이다. 노란 꽃초롱이다. 엄마 같은 꽃이다. 넉넉하고 따뜻한 꽃이다. 깊은 산속 오두막을 밝혀주는 호롱불 꽃이다. 수더분한 누님 같은 꽃이다.

늦가을 늙은 호박은 ‘황토보살’이다. 초가지붕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미륵보살. 온갖 욕망을 털어버리고 넉넉하게 맨몸으로 앉아있는 늙은 호박은 생의 절정이다. 호박떡 호박죽 호박찌개 호박범벅은 그의 사리일 뿐이다. 굳이 호박에 줄 그어 수박 만들 필요 없다. 호박은 호박이고, 수박은 수박이다. 하지만 어디 호박이 공짜로 굴러 오는가? 새봄, 햇볕 잘 드는 울타리 밑에 호박씨를 정성스럽게 심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호박을 잘 먹지 않는다. 호박씨는 말할 것도 없다. 호박씨 껍질을 벗기면 연한 녹색의 보늬(속껍질)가 나온다. 보늬는 고소하다. 아련하고 아득하다.

 

옛날엔 수박씨도 까먹었다. 요즘엔 어림없는 이야기다. 하기야 씨 없는 수박까지 나왔다. 겉과 속이 노란 수박도 있다. 아이들은 수박도 한참 안쪽 가운데만 베어 먹고 버린다. 붉은 살이 한참 남아 있다. ‘농민의 수고로움’을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듣는 둥 마는 둥 ‘수박 겉핥기’이다. 얼음 동동 뜬 수박화채나 해 줘야 “꺄악∼” 호들갑을 떤다.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는 마음은/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그윽한 마음이라/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情이 깃들인 것이다’ 
<백석 1912∼1995·‘수박씨, 호박씨’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