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9명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늘 1위를 차지한다. 2위는 김대중, 3위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4위와 5위는 이승만 전두환 대통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50∼6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건국(建國)과 6·25전쟁의 극복에 대한 우리 세대의 이해가 너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은 이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45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말년에 씻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르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해 귀국하지 못했다.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3·15 부정선거, 그리고 4·19 유혈사태는 오랜 세월 그의 공(功)마저 깎아내린 게 사실이다. 올해는 광복 65주년, 건국 62주년,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냉전 질서가 자리 잡던 혼란기에 그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바로 서고 3년 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 없이 대한민국 있었을까
그러나 당시의 세계질서와 국내 정세를 돌아보면 단정(單政) 노선은 현실적 선택이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1945년 9월부터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 나갔음이 구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의회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진영을 넘볼 수 없도록 포위의 블록을 쌓아 그들의 팽창을 저지하겠다”며 냉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 대통령의 반공(反共)은 새로운 냉전 질서에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날개에 올라타 남한 정부를 이끌고 가려던 전략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체제 경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체제 비교는 현실로 나타난 결과가 실험을 대신해줄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건국과 부국’, 김일영 저).
국제정세를 통찰하는 이승만의 예견(豫見) 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2년경부터 미 국무부 관리들을 만나 미국이 선수를 쳐 한국 독립을 미리 승인하지 않으면 일본 패망 후 소련이 반드시 끼어들어 한국을 강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이한우 저). 그의 혜안은 미국에서 집필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1년에 출간한 일본 내막기는 일본이 구조적으로 군국주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그대로 방치할 경우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서점에서 매진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富國길 닦은 건국세력 재평가를
이 대통령은 미국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전쟁을 치르는 약자의 처지에서도 북진론(北進論)과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의 대통령, 장군, 외교관들을 압박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관철했다. 전후 57년 동안 한국 안보는 이 대통령이 쟁취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근간으로 한 강력한 한미동맹에 의지했다. 이 대통령은 말년의 독재와 실정 때문에 미국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처럼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과 6·25전쟁 극복은 그의 국제정치적 혜안과 외교 역량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건국 대통령의 동상도 세우지 못하는 나라, 세계 10위권 부국(富國)의 기틀을 마련한 건국세력을 평가하지 않는 나라에서 식민지와 가난과 전쟁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