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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광복 후의 한일 관계]⑦끝나지 않는 한일 갈등

입력 | 2010-07-20 03:00:00

마르지 않는 ‘100년 눈물’… 징용-징병 피해 22만건 접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위로금 지원은 현재 대한민국의 예산으로 집행 중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 대부분은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 보상을 받겠다며 위로금 신청을 하지 않았다. 1월 13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900차 수요집회를 여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차분하던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비쳤다. 일제에 징병을 당해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서 사망한 큰형을 어머니가 생전에 무척이나 그리워하셨다는 대목에서였다. 14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에스타워 8, 9층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지원위원회) 민원실에서 만난 김무웅 씨(70). 그는 “열네 살이나 위였던 형님은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남지역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 일본 상고로 유학을 가 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씨는 이날 어머니 명의로 공탁돼 있던 형의 월급 891엔에 대한 지원금 178만 원을 받아가라는 결정 통지를 받고 위원회를 찾아온 길이었다. 전화와 방문 등 이날 하루만 400여 통의 문의가 위원회 민원실로 쏟아졌다. 매월 위로금이나 피해사실 결정내용이 통지되고 나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 현재진행형인 ‘과거사 처리’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근원이 돼 발생한 한일 갈등은 ‘한류’나 월드컵 공동개최로 가까워진 듯 보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갈등 분야는 크게 △역사인식 △과거사 처리 △영토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역사인식에는 교과서 왜곡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있다. 과거사 처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징병·징용, 사할인 거주 한인, 원자폭탄 피해, 문화재 반환, 재일한국인 지방참정권 문제 등이 있다. 영토 문제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억지 주장을 들 수 있다.

지난해 8월 일본 도쿄 스기나미 구의 교육위원회가 역사왜곡교과서인 후소샤판 교과서를 교재로 채택하는 것에 반대해 ‘스기나미의 교육을 생각하는 다함께 모임’ 회원들이 구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사진 제공 ‘스기나미의 교육을 생각하는 다함께 모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위로금 지원은 현재 우리 정부예산으로 집행된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옛 소련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했음에도 시베리아 억류 자국인의 개인 청구권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포기한 것은 외교적 보호권이지 개인 청구권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14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개별기업으로서 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뜻이 있음을 내비친 것도 사실상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아니다.

2004년 이후 지금까지 위원회는 모두 22만8000여 건의 피해를 접수해 이 가운데 절반이 조금 넘는 12만4000여 건을 처리했다. 아직 10만6000건이 처리되지 않았다. 대부분 공식 근거가 없고 가족들의 증언만 있어 조사에 어려움이 많은 사안들이다.

지원위원회 이재철 공보담당관은 “일본 정부의 후생연금 명부나 공탁금 자료가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작년에 한국에서 넘겨준 희생자들의 일부 후생연금 명부의 존재만 알려준 상태로 입사·퇴사일, 연금규모 등의 정확한 자료는 넘겨주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 보상을 받겠다며 위로금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다.

○ 갈등의 중심축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


도쿄 스기나미(杉竝) 구에 있는 ‘스기나미의 교육을 생각하는 다함께 모임’(다함께 모임)은 일본 정부의 왜곡 교과서 문제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다. 2001년 스기나미 구가 역사왜곡 교과서인 후소샤(扶桑社)판 교과서를 중학교 교재로 채택하려 하자 학부모와 교사들이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해 ‘다함께 모임’으로 발전했다. 당시 10만 명이 넘는 반대서명을 받아 교육위원회에 보내고, 항의의 표시로 회원 1000여 명이 구청 건물을 에워싸는 인간사슬 투쟁을 벌이며 반대한 끝에 교과서 채택을 저지했다.

스기나미 구 교육위원회가 2005년과 2009년 후소샤판 교과서를 결국 교재로 채택하면서 이 단체는 더 바빠졌다. 사무실도 없고 지도부도 구성하지 않았지만 20∼80대의 다양한 연령대 회원들은 인터넷 블로그를 사무실 삼아 e메일과 전화로 연락하며 활동하고 있다. 우익 교과서 반대 집회, 시민역사강좌 등을 열고 있으며 후소샤판 교과서를 비판하는 대안 교과서인 ‘해독(解毒) 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일본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의 망언을 통해 역사 인식을 드러내 왔다. 1953년 10월 한일회담장에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일본 대표의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혜택을 줬다’는 취지의 망언을 시작으로 1963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1977년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 2000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2010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지사 등 최고위급 인사들의 망언 파동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이런 현실에서 ‘다함께 모임’ 창립 초기 때부터 회원으로 활동해온 도모토 히사코(堂本久子) 씨의 말은 일본 정부가 새겨들을 만하다.

“교과서 문제는 비단 교육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다. 편협한 역사인식이 남에 대한 멸시와 배제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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