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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엉성한 셰익스피어’ 웃음으로 빛나다

입력 | 2010-07-20 03:00:00

음악극 ‘베로나의 두 신사’
연출 ★★★☆ 연기★★★☆ 무대★★★☆




셰익스피어 원작의 로맨틱 코미디를 자기풍자적 음악극으로 재탄생시킨 ‘베로나의 두 신사’. 밀라노 공작의 딸 실비아(김아선·가운데)를 차지하기 위한 구혼자들의 마상창술 대결을 희화화했다. 사진 제공 신시컴퍼니

‘베로나의 두 신사’는 셰익스피어 원작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엉성한 로맨틱 코미디다. 이탈리아 베로나 출신의 죽마고우 밸런타인과 프로테우스가 우정이냐 사랑이냐를 놓고 갈등을 벌이다 결국 윈-윈 한다는 줄거리다. 인물의 정형성은 이미 주인공들의 이름에 아로새겨져 있다. 연인들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지닌 밸런타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훈남’의 전형이다. 반면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바다의 신 이름을 지닌 프로테우스는 변덕쟁이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셰익스피어 온갖 작품의 특징이 골고루 응축돼 있다. 본심을 감추고 새침을 떠는 여인(‘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발코니 앞의 세레나데(‘로미오와 줄리엣’), 충심을 가장한 배신(‘오셀로’, ‘헛소동’), 숲으로의 추방(‘뜻대로 하세요’), 사랑을 쟁취하는 남장여자(‘베니스의 상인’,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 변덕스러운 사랑을 쫓아 우왕좌왕하다 제 짝을 찾아가는 해피엔딩(‘한여름 밤의 꿈’)…. 마치 누군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모방해 짜깁기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셰익스피어 연구가들이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 최초의 희극’을 넘어서 ‘셰익스피어 최초의 희곡’으로 추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다른 작품을 통해 새롭게 발전하는 모티브를 골고루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여성연출가 글렌 월퍼드는 이렇게 한편으론 허술하면서도 한편으론 백과사전적인 구조에서 역설적 웃음을 끌어낸다. 그 지렛대는 능청스러운 연기와 익살스러운 무대연출,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이다.

배우들은 정형화된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희화화함으로써 웃음을 끌어낸다. 속물로 그려지는 조연들은 아예 대놓고 진상을 떨고 처음엔 멋지게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조연들을 무색하게 할 뻔뻔한 연기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밸런타인 역의 김호영 씨와 프로테우스 역의 이율 씨는 한껏 멋을 부리다가 민망한 상황에 빠지길 반복하며 중세 기사도정신을 끊임없이 풍자한다.

원작의 희극성을 극대화한 무대연출도 빼놓을 수 없다. 밀라노 공작의 딸 실비아(김아선)를 놓고 마상창술 대결이 펼쳐지는 장면에선 남자들이 남성미를 한껏 과시한다는 게 앙증맞은 말 인형을 타고 등장해 막대손을 휘두르며 서로의 뒤통수 때리기에 급급하다. 프로테우스의 하인인 란스(김남호)의 무심한 애완견으로 등장하는 땡칠이의 시무룩한 표정 연기도 웃음을 더한다.

압권은 실비아를 탐내 우정을 배반한 프로테우스의 마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밸런타인은 “적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내 적 중의 적으로 드러난 지금 이 시간은 저주받은 시간”이라며 분노한다. 어이없게도 프로테우스는 이 말에 바로 회개 모드로 돌아선다. 밸런타인은 이에 “내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자네가 알 수 있게 내 사랑, 실비아를 자네를 위해 내가 포기하겠어”라며 ‘폼생폼사’의 극단을 보여준다.

원래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자기풍자 정신에 충만한 이 작품에선 포복절도할 명장면으로 변신한다. 뿐만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선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던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통속극적 요소를 극대화함으로써 ‘세 배의 웃음’을 안겨준다.

사실주의 연극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카니발적 요소를 만끽할 수 있는 무대다. 5인조 라이브 밴드의 음악에 맞춰 밸런타인과 프로테우스가 번갈아 부르는 ‘실비아는 누구인가’ 등 10곡의 노래가 그 징검다리가 돼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4만∼6만 원. 8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02-577-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