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성들, 현지 경찰단속 피해 승합차 타고 ‘007 맞선’
재혼을 결심한 A 씨(40)는 지난달 초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닐라 공항에서 마중 나온 현지 국제결혼중개업체 직원을 만나 오후 2시경 호텔에 도착한 그는 잠시 눈을 붙인 뒤 오후 7시 맞선을 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한 20분쯤 차를 타고 달리니 한적한 곳에 주차된 승합차가 눈에 들어왔다. 승합차 주변엔 5명의 필리핀 여성이 있었다. 현지 직원은 “경찰 단속이 심해 승합차 안에서 맞선을 봐야 한다”며 “더 이상 아가씨들이 없으니 (맞선을 볼 것인지 말 것인지) 지금 결정하라.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추가비용을 내야 한다”고 독촉했다. A 씨는 결혼중개업체 홈페이지에서 미리 점찍어둔 B 씨를 골라 차에 올라탔다. 마닐라 도심 외곽을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A 씨는 B 씨와 1시간가량 통역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눴고, 차에서 내릴 때는 결혼을 약속했다. ‘007작전’ 같은 맞선을 마친 A 씨는 다음 날 오전 B 씨와 함께 병원에 들러 건강검진을 받고, 대사관으로 가 영사와 면담하고 혼인신고를 했다.
이주여성 인권 신장을 주장하는 집회에서 한 여성이 이주여성을 상품화하는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를 낫으로 찢고 있다. 2007년 이후 정부가 단속을 시작하면서 현수막은 줄어들었지만 여성을 상품화하는 국제결혼중개업체의 광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 남성과 국제결혼이 많이 이뤄지는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에서는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결혼은 불법이다. 그런데도 지난해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7249명), 필리핀(1643명), 캄보디아(851명) 출신 여성은 1만 명에 육박한다. 사실상 매년 1만 명의 동남아 여성들이 불법적인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셈이다. 한 국제결혼중개업체 관계자는 “단속되더라도 동남아 국가에선 ‘뇌물’ 같은 방법이 먹힌다”며 “불법인 줄 알지만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제결혼이 음지로 들어갈수록 현지 여성들은 한국 남성의 신상정보를 더욱 알기 힘들어진다. ‘베트남 새댁’ 탁티황응옥 씨도 남편이 8년간 정신질환을 앓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결혼 전에는 몰랐다. 국제결혼중개업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중개업자는 결혼 상대자에게 혼인경력과 건강상태, 직업, 범죄경력 등을 해당 국가의 언어로 작성해 제공해야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속전속결로 결혼을 성사시켜야 하는 중개업체들은 한국 남성들의 직업과 경제능력도 부풀린다. 예를 들어 남자 직업을 소개할 때 일용직 근로자는 ‘건설업자’로,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사람은 ‘대형 슈퍼마켓 운영자’로 포장한다.
○ 동네방네 뿌리내린 알선업체
이들 마담뚜가 국제결혼 알선업체에 한국 남성을 소개해주고 받는 알선료는 건당 100만 원 정도. 이주여성 인권단체 관계자는 “남성이 정신장애가 있거나 알코올의존증 환자라도,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이런 사실을 속이고 결혼중개업체에 고객으로 등록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영세·미등록 업체는 더욱 위험
등록 국제결혼중개업체는 2008년 922개에서 올 6월 말 현재 1253개로 36%가량 증가했다. 문제는 이 중 70% 이상이 영세한 ‘1인 업체’라는 것이다. 해당 시도에 국제결혼 중개업 등록을 했지만 실제 국제결혼을 진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대형 업체에 소개비를 받고 고객을 알선하면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탁티황응옥 씨와 결혼한 장모 씨(47)도 부산 중개업체 고객으로 등록했지만 실제 결혼을 성사시킨 곳은 경기도에 있는 중개업체였다. 국제결혼중개업협회는 한 해 치러지는 2만5000여 건의 국제결혼 가운데 등록 업체를 통해 이뤄지는 건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결혼 과정에 여러 업체가 개입하면 책임 회피로 피해 보상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미등록’ 중개 업체나 개인을 통해 결혼한 이주여성은 사기결혼 등 피해를 당하더라도 보상을 받을 길이 없다. 국제결혼중개업협회 한유진 회장은 “개인이 진행하는 국제결혼은 대부분 문제가 발생한다”며 “인터넷에 카페 등을 만들어 활동하는 업체도 요주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박진우 기자 pjw@donga.com
이주여성인권단체들은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 2008년 6월 15일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학대받는 이주여성들을 보호하고 적절한 보상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2005년 발의된 결혼중개업 법률은 국제결혼 알선업체의 난립과 불법적인 중개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자유업’인 국제결혼 중개업을 등록제로 전환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국제결혼 중개업체 설립 시 외국 현지 법령을 준수하고 표준 계약서를 작성하며, 거짓 과장된 표시나 광고를 금지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또 결혼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경우 자동적으로 업체가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했다. 과거에는 피해 구제를 위해서는 당사자가 직접 민형사상 소송을 걸어야 했다.
국제결혼 알선업체의 탈법적 영업을 막을 국가 간 공조 노력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인신매매방지법을 발의한 김춘진 의원실 유경선 보좌관은 “국내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의 질이 낮은 것은 그만큼 상대 국가 결혼중개업체들도 음성적으로 알선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는 반증”이라며 “국제공조를 통해 불법이 횡행하는 결혼 중개시장을 양성화하고, 비영리 결혼중개기관을 세워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뿐만 아니라 외교통상부, 법무부 등이 유기적으로 협업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사기결혼은 인신매매로 처벌해야” ▼
한국염 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62·사진)는 20일 “(현재의 법률은)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아 속아서 결혼한 여성을 보호할 장치가 거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인신매매방지법은 민주당 김춘진 의원이 올해 초 발의한 법률로 인신매매를 방지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한 대표는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시집온 이주여성들도 넓은 범위에서는 인신매매를 당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에 대한 권리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남편에게 매를 맞는 등 가정폭력을 당한 이주여성들 외에는 보호시설에 입소하거나 법적인 권리 구제를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한 대표의 설명이다. 사전에 알지 못한 남편의 장애나 병력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당하는 경우 구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한 대표는 “이런 이유로 이혼을 하거나 시댁에서 도망쳐 나와 국적을 박탈당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며 “전체 결혼 이주여성 약 16만8000명 중 8%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고 설명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박수유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 화제의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