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지음·박중서 옮김/368쪽·2만 원/사이언스북스
내가 보기에 세이건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회의론적 휴머니스트였다. 꿈꾸는 낭만주의자였고 실천하는 합리주의자였다. 그가 어느 시대를 살았건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가장 절실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건강한 합리적 실천의 길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이 16세기였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세기 현실에서 그가 택한 것은 당연히 과학자의 길이었다.
이 책은 1985년 10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에서 보름 동안 열렸던 세이건의 자연 신학에 관한 기퍼드 강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종교, 과학, 철학 분야 강연들 중에서 유서 있고 수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기퍼드 강연은 스코틀랜드 출신 법률가 애덤 기퍼드 경의 기부금으로 시작됐다. 하마터면 칼 세이건 기록보관소의 서랍 한구석에 영원히 파묻혀 버릴 뻔했던 그의 강연을 글로 다시 만난 것은 덤으로 얻은 행운이다.
칼 세이건 사진 제공 사이언스북스
하지만 세이건은 이 책에서 종교와 신의 문제를 정조준하고 있다. 그는 종교 또는 종교 현상이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존재해왔고 선행이든 악행이든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기존의 종교 교리에서 사용했던 논리들의 허구성, 종교의 본질적이거나 현실적인 폐해에 대해선 단호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자연과 우주 속에 있는 신의 존재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이 강연에서 자연과 우주 속에서 발견된 신의 존재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백미라고 할 만한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이라는 꼭지에서 세이건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힌두교에서 근대 기독교 신학자들까지 수천 년 동안 제시된 신 존재 증명들을 하나하나 논파하면서, 만약 신이 있다면 위성 궤도에 거대한 십자가를 띄우거나 달 표면에 십계명을 새겨 놓는 식의 명확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겠느냐며 “왜 하느님은 성서에서는 그렇게 뚜렷하면서도, 이 세계에서는 그처럼 모호한 것일까요”라고 공박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박과 비판은 누구처럼 종교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이건은 “증거의 부재가 곧 부재의 증거”는 아니고 아직 결론은 열려 있다며 종교와 과학이 서로 함께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의 공감. 이 공감을 나누어 지적 수렴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종교가 인류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서 취해야 할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조언하면서 숨통을 터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세이건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약간의 서글픔도 안겨 준다. 특히 책 뒷부분에는 강연 후 이어진 질문과 답변 내용이 정리돼 있는데, 강의 내용과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맥 빠지는 질문들(세이건이 그렇게 논박했는데도 UFO와 신의 관계, 토리노의 수의 관련 질문들이 계속 나온다)과 그에 대한 친절하고 현명한 대답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이 순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이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현실과 사건’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1985년에 열렸던 세이건의 기퍼드 강연을 옮겨 적은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이건의 관점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설득력이 있는 것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현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