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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前수도경비사령관 별세

입력 | 2010-07-28 03:00:00

12·12때 신군부에 대항… ‘군인의 표상’ 추앙




신군부 인사들도 조문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장태완 신임 사령관(왼쪽)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지휘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6일 오후 향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예비역 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는 수많은 선후배 군인이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12·12쿠데타 당시 30경비단장으로 고인의 직속 부하였지만 신군부에 가담했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육사 14기 출신으로 하나회 총무를 지낸 이종구 전 국방장관도 27일 빈소를 찾았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날 빈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시했다.

고인은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교육참모부 차장 등을 거쳐 1979년 1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다. 1개월 뒤인 12월 12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장 사령관은 신군부 측에 대항해 수경사 탱크에 올라가 “반란을 막자. 역모자들을 체포해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많은 장교가 이미 신군부에 가담해 장 사령관을 따르는 장교는 60여 명에 불과했다.

신군부 세력이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강제 연행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사령관은 육군총장 공관에 구출대를 보내고 한강 교량 등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명령했지만 신군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군부 측은 장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그가 완강히 버티자 결국 체포했다. 장 사령관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전 사령관이 “집에 가셔서 6개월쯤 쉬시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자 “패장을 죽이지 않고 집에 보내준다니 나가야지”라며 예편서를 썼다.

고인은 훗날 신군부에 맞섰던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이 정승화 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며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강제 전역의 충격으로 부친은 식음을 끊고 별세했고,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아들은 1982년 낙동강 근처 산기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2·12쿠데타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면서 고인은 ‘군인의 표상’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1994년 27대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된 뒤 28대 회장에 재선됐고, 2000년에는 민주당에 입당해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008년 8월 폐암 수술을 받고 투병하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는 전두환 편보다는 배신자들을 더 증오한다. 정병주 김진기 외엔 전부 배신했다”고 말하곤 했다.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은 12·12쿠데타 때 강제 전역됐고 1989년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진기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도 2006년 지병으로 숨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병호 씨와 딸 현리 씨, 사위 박용찬 씨(인터젠 대표)가 있다. 영결식은 29일 오전 8시 반 서울아산병원에서 재향군인회장으로 엄수된다. 02-3010-2231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