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때 신군부에 대항… ‘군인의 표상’ 추앙
신군부 인사들도 조문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장태완 신임 사령관(왼쪽)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지휘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2·12쿠데타 당시 30경비단장으로 고인의 직속 부하였지만 신군부에 가담했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육사 14기 출신으로 하나회 총무를 지낸 이종구 전 국방장관도 27일 빈소를 찾았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날 빈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시했다.
신군부 세력이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강제 연행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사령관은 육군총장 공관에 구출대를 보내고 한강 교량 등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명령했지만 신군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군부 측은 장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그가 완강히 버티자 결국 체포했다. 장 사령관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전 사령관이 “집에 가셔서 6개월쯤 쉬시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자 “패장을 죽이지 않고 집에 보내준다니 나가야지”라며 예편서를 썼다.
고인은 훗날 신군부에 맞섰던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이 정승화 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며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강제 전역의 충격으로 부친은 식음을 끊고 별세했고,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아들은 1982년 낙동강 근처 산기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2·12쿠데타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면서 고인은 ‘군인의 표상’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1994년 27대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된 뒤 28대 회장에 재선됐고, 2000년에는 민주당에 입당해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008년 8월 폐암 수술을 받고 투병하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는 전두환 편보다는 배신자들을 더 증오한다. 정병주 김진기 외엔 전부 배신했다”고 말하곤 했다.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은 12·12쿠데타 때 강제 전역됐고 1989년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진기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도 2006년 지병으로 숨졌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