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강 협곡서 농부생활 20년…일상-사색 꼼꼼히 일기로 정리성실히 일하고 정직하게 수확…“함부로 농부 계몽하려 들지 말라”◇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최영준 지음/688쪽·1만8000원/한길사
2002년 10월 22일, 직접 재배한 벼를 수확하고 있는 최영준 교수. 20년 동안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농사를 지은 최 교수는 “농토를 소유하려면 땅을 사랑해야 하고, 작물을 가꿀 체력이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라도 배우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 제공 한길사
자갈이 깔린 비포장 도로. 지프가 좌우로 흔들리고 상하로 뜀뛰기를 하여 (강원) 홍천군 서면 반곡리에 이르렀을 때는 혼이 다 빠져나간 것같이 어지러웠다. 차를 두고 농로 2km를 걷고, 마을 나룻배의 삿대를 저어 홍천강을 건넜다. 다시 1km 정도 꽃님이고개를 넘어가니 엷은 분홍색 벚꽃 물결 사이로 납작하게 숨은 붉은 양철 지붕이 보인다.이것이 바로 내가 구입한 집이라고 한다.”》
대리인을 통해 구입한 시골집을 처음 찾아간 날, 저자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지금처럼 도로가 반듯하지 않던 20년 전. 그는 산 넘고 물을 건너야 겨우 닿는 곳에 집과 논밭을 얻었다. 고려대 지리교육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문화재위원인 저자의 ‘농부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주중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주말이면 홍천강 협곡에서 농사를 지은 저자의 일기를 엮은 책이다.
이곳에 터를 얻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저축한 돈을 사용한 최 교수 부부는 연평균 120일을 이곳에 머무르면서 농사를 지었다. 직접 밭을 갈아 고추 고구마 토란 도라지 호박 수박을 심었고, 근처의 농부에게서 배워가며 논농사로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날짜별로 정리된 일기를 읽다 보면 점점 ‘진짜’ 농부로 변신해가는 저자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가뭄과 고온에 지쳐 고추는 쪼그라들었고 호박은 거의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먹구름이 다가오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하도 반가워서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환성을 질렀더니 옆에서 일하던 K 노인이 빙그레 웃는다.”(1992년 7월 30일)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마치 음악소리처럼 들린다. 낙숫물에 파인 구멍의 깊이에 따라 소리가 다른데 깊은 구멍에서는 맑고 높은 소리, 얕은 구멍에서는 둔하고 낮은 소리가 난다. 이런 여러 가지 소리가 이 구멍, 저 구멍에서 번갈아 들린다.”
저자의 농촌 생활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둘째 아들에게 처음으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여준 일도 즐겁고, 자두꽃과 벚꽃이 집 주변에서 펼치는 꽃 잔치를 보는 것도 즐겁다. 연못의 비단잉어는 가끔씩 수면 위로 뛰어오르며 화려한 비늘을 주인들에게 선보인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수확하는 일을 한 해 한 해 반복하면서 부부는 영락없는 농사꾼으로 변해간다. 농부들을 무지렁이 정도로 여기며 함부로 여기저기서 총질을 해대는 사냥꾼을 불러 세워 야단치고, 가뭄에 애태우는 농부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강변 모래밭에서 요란한 음악을 틀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는 가운데 ‘무소유’에 대해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된다. “농작물을 가꾸느라 무엇인가를 가꾸느라 땀을 흘리고, 손톱이 거칠게 닳아 손끝이 시리며, 힘든 작업 중에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이 뜯겨 아린 고통을 느끼며, 팔다리에 알이 배어 땅기는 이 힘든 생활도 무소유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면서 나는 수시로 무의식에 빠진다. 이 무의식의 순간이 무소유에 비해 가치가 없을까.”
2009년, 저자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농부가 됐다. 마을 사람들의 추천으로 농업경영인이 된 것이다. 그는 3월 31일자 일기에서 “퇴직 후 K대학 명예교수라는 직(職)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업(業)은 상실했기에 한동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이제는 정식으로 농업인이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베푼 영광임에 틀림없다”며 기쁜 심정을 기록했다.
이들 부부는 주소지도 아예 이곳으로 옮겼다. 저자는 “서울 서초구에서 강원 춘천시 남산면으로 바뀐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들고 강원도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고 다짐해 보았다”고 썼다.
일기가 최근으로 오면서 점점 달라지는 농촌의 풍경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넓은 도로가 뚫리면서 최근까지 마을 사람들이 왕래하던 꽃님이고개 같은 샛길들은 초목에 묻혀 사라졌고, 토지의 격이 높아지자 일찌감치 도시로 나간 자식들이 전과 달리 자주 늙은 부모를 찾아와 눈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20년 전 현대식 개발의 파고를 겪지 않을 곳을 물색하다가 이 홍천강변의 궁벽한 터를 발견했는데 채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밤마다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다짐한다. “내 기력이 다할 때까지 땅과 함께하는 생활은 계속될 것이며 나는 하루하루를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