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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시위 주역이 버핏의 유력 후계자로

입력 | 2010-07-31 03:00:00

‘중국인 리루의 인생반전’ WSJ 인터넷판 집중조명




민주화운동가에서 펀드매니저로 1989년 동료 학생들과 함께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리루 씨(두 사진의 점선 원)는 이후 펀드매니저로 성공해 지금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했다.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버핏 회장, 왕촨푸 비야디 회장, 리 씨. 사진 출처 월스트리트저널

어린 시절 문화혁명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20년 뒤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됐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헤지펀드 매니저로 명성을 쌓았으며 이제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유력한 후계자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은 30일 역사의 고비마다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 이 40대 중국인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WSJ는 “올해 44세의 펀드매니저 리루(李路)가 버핏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다”며 “역발상과 가치투자를 중시하는 리 씨의 투자철학도 버핏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보도했다. 올해 80세인 버핏 회장은 아직까지 은퇴 의사를 밝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하던 투자업무를 2, 3명에게 나눠주는 방식의 후계구도를 오래전부터 구상해왔다. 리 씨가 이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리 씨의 삶은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한 살도 채 안 됐을 무렵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문화혁명으로 숙청돼 탄광으로 끌려갔고 어머니도 강제노동 캠프에 들어갔다. 리 씨는 이때부터 이집 저집에 맡겨지며 입양생활을 시작했다. 부모가 없는 학창시절은 싸움과 방황의 연속이었지만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할머니의 노력으로 마음을 다잡아 난징대에 입학했다.

리 씨 인생의 물줄기를 또 한 번 바꾼 것은 1989년 톈안먼 사태였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규합하고 단식투쟁에도 나선 그는 데모가 무력진압될 즈음 미국으로 망명해 컬럼비아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버핏 회장과의 인연은 1993년 우연히 대학 교정에서 그의 강연을 들었을 때 시작됐다. 리 씨는 “중국에서 살 때는 금융시장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의 강연을 들은 후 주식시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극복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학비 마련을 위해 혼자 주식투자를 해 적지 않은 돈을 번 리 씨는 졸업 후엔 아예 자신의 투자회사를 차렸다. 그는 인권운동가로서의 전력을 이용해 버크셔의 찰스 멍거 부사장을 비롯해 부유한 투자자를 상당수 모았다. 비록 아시아 외환위기 등으로 손실도 여러 번 겪었지만 1998년 이후 펀드의 연환산 수익률이 26.4%나 될 만큼 실적이 준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잘나가는 중국계 펀드매니저’였던 리 씨가 결정적으로 버핏 회장의 눈에 든 것은 2008년. 그해 리 씨는 자신이 이미 투자해 재미를 보고 있던 중국의 전기자동차 기업 비야디(BYD)를 멍거 부사장에게 추천했고 이에 버크셔는 2억3000만 달러를 BYD에 직접 투자했다. 지금 이 주식의 평가액은 원금의 6배가 넘는 15억 달러로 불었다. 리 씨의 조언이 투자에 있어 친환경 에너지를 중시하는 버핏 회장의 철학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WSJ는 리 씨의 버크셔 합류 가능성에 대한 버핏 회장의 직접적인 코멘트를 싣지는 않았다. 하지만 멍거 부사장의 발언을 인용해 “리 씨가 조만간 회사의 최고투자책임자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리 씨는 “내가 버크셔의 이너서클이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며 이는 꿈에서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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