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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광복 후의 한일 관계]⑧해외에 남겨진 식민의 상처

입력 | 2010-07-31 03:00:00

“위안부 출신” “조센진”… 고국서도 타국서도 이방인 ‘멍에’




하상숙 할머니는 “2003년 일시 귀국했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결국 중국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몸도 마음도 의지할 곳이 없어 빨리 죽고 싶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우한=구자룡 특파원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누구라도 얘기해야지요.”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중국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에서 겪었던 8개월 남짓한 일본군 위안부 생활. 평생 응어리를 안고 살아온 하상숙 할머니(82)를 16일 우한의 중산다다오(中山大道)에 있는 한족 남편의 셋째 딸 집에서 만났다. 하 할머니는 가슴에 맺힌 얘기를 털어놓다 여러 차례 눈물을 훔쳤다.》

■ 위안부로 中우한에 끌려간 하상숙 할머니


아홉 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 충남 예산에서 살던 그는 “중국에 가면 공장에 취직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고 한 이웃 언니의 말만 듣고 집을 나섰다. 1944년 6월 고향을 떠난 하 할머니는 경성(서울)과 톈진(天津)에 잠깐씩 머문 후 기차에서 새우잠을 자며 그해 12월 우한에 도착했다.

우한 한커우(漢口) 지칭리(積慶里)에 도착해서야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됐다. 하지만 길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좁은 길 양옆으로 최소 열두 채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는데 길 입구에는 철로 만든 문이 있고 일본군이 쓰던 건물이 지키고 있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평양 출신이라는 주인 부부에게 몽둥이로 맞는 언니들도 있었지요.”

일본 패망 후 같이 있던 여성 중 상당수는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하 할머니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남의 집 삯일 등을 하며 지내던 하 할머니는 1955년에 딸만 셋인 전기기술자 한족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남편은 “그건 옛날 일이다”며 오히려 아픔을 감싸주었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딸 외에는 아직도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살고 있다. 그래서 중국 가족과 50년 이상을 같이 살았지만 ‘피 안 섞인 한족’들 속에 홀로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같이 있던’ 친구들도 오래전에 모두 사망해 대화할 사람도 없다고 했다.

“日 패망후 한국 가려했지만 차마 용기 안나 눌러앉아”
2003년 59년 만에 귀향 고향사람들 차가운 눈초리에 2년반 떠돌다 다시 中으로


하 할머니는 민간단체 등의 도움으로 2003년 한국을 떠난 지 59년 만에 한국에 일시 귀국해 북한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도 회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물었다.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생각이 복잡해서….” 이윽고 할머니는 “어디고 몸도 마음도 의지할 곳이 없어 빨리 죽고 싶다”며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하 할머니는 고향에 갔을 당시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떠올렸다. 하 할머니를 위로하기보다는 고향에 나타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중국으로 다시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친척이 있다는 말도 들렸다. 그래서 고향 밖에서 2년 반가량 떠돌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 할머니는 “조국이 잘살게 돼 불과 몇십 년 전에 나라를 잃고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아쉬워했다. 광복 후에도 자신처럼 돌아가지 못하다 밑바닥 인생을 살거나 자살하기도 한 ‘동료 여성’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러보기도 했다.

하 할머니는 최근 수년간 일본의 몇몇 민간단체에서도 찾아와 자신의 과거 얘기를 듣고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용돈조로 돈을 주려고도 했지만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몇 푼이 됐든 일본이 공식 사과하고 법에 따라 배상을 해야 받을 수 있지요.”

우한=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日서 단바망간기념관 운영하는 이용식 씨


이용식 단바망간기념관장은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려면 일본이 가해자로서 자신의 역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라고 말했다. 교토=김창원 특파원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라고들 하는데 99년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지요? 단지 차별의 역사가 1년 더 늘었을 뿐인데….”

15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이용식 단바(丹波)망간기념관장(50)은 불쑥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한류 붐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아진 것은 다행이지만 일본의 철저한 반성 없이 한일 관계가 좋아지길 기대하는 것은 꿈같은 소리”라는 게 오십 평생 일본을 겪으면서 느낀 그의 일본관이다.

이 관장은 1960년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당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오히려 더해만 갔다. 그는 “집을 나서면 일본 그 어디에도 재일교포를 따뜻하게 받아들여준 곳은 없었다”며 “하루라도 일본인의 차별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씁쓰레했다.

“강제병합 100년 떠들지만 차별의 역사 1년 늘었을 뿐 99년과 무슨 차이 있나
일본은 내가 살아온 50년간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처음으로 학교 문턱을 밟았을 때 담인 선생님한테 들은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차별의 경험에 대해 묻자 되돌아온 질문이었다. 그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조선인이어서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고 했다. “아무리 조선인이어도 학교에서만큼은 절대 나쁜 짓을 용납할 수 없으니 주의하라”는 협박성 경고와 함께.

사춘기 시절 조선인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에 지친 그는 일찌감치 고교를 중퇴하고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돈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멸시는 더욱 혹독했다.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건설현장 잡부 같은 단순노동직밖에 없었어요. 조선인은 믿지 못할 사람이니 일을 주지 않는 거였죠. 그나마 미싱회사 영업사원이 가장 그럴싸한 직업경력 중 하나였지만 이마저도 오래 못했어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 되돌아온 곳은 광산이었어요.”

그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불신은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만들어낸 악순환”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징용된 게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왔다는 이른바 ‘자발적 도일(渡日)설’에 대해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 당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명목으로 토지를 모두 수탈해 농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며 “사실상 일제가 강제징용으로 내몬 것을 자발적인 구직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고 하는 무책임한 말”이라며 분개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커피숍 주변에 앉은 일본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일제의 만행을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재일교포에 대한 무시가 만연한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나름대로 체득한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와 아버지 이정호 씨(사망)는 ‘일본이 지우고 싶어 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일본 땅 안에 영원히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1989년 교토에서 동북쪽으로 50km 떨어진 게이호쿠(京北) 지역에 단바망간기념관을 설립했다. 이곳은 망간 텅스텐 등 각종 광물이 묻혀있는 광산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로 끌려온 조선 노동자 2000여 명이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린 곳이다. 이 씨의 아버지 역시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평생을 보냈다. 이 관장은 지난해 5월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폐관했다가 한일 시민단체들과 함께 ‘재건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모금활동을 벌이면서 내년 4월 재개관을 추진하고 있다.

교토=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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