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학대 보앗는고…” 조선방문 美의원단에 영문논설로 고발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진영이 뜻을 모아 설립한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성과가 제한적이었던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갔다. 조선 민중의 ‘독립 성취’ 목소리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세계 열강에 조선인의 요구를 전할 수단이 부족했던 대목이 특히 아쉬웠다. 이에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독립의 열망을 세계와 공감하기 위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보도 및 논평과 독자적인 독립 외교를 추구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조선을 찾았다. 민족진영은 이를 일제의 폭압을 고발해 미국 정계와 사회 전반에 조선의 독립에 대한 지지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동아일보는 8월 10일 장덕준 김동성 두 기자를 베이징으로 특파했다. 두 기자는 존 스몰 단장과 스티븐 포터 하원 외교위원장을 인터뷰하고 한민족의 독립 운동을 후원해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의원단이 도착한 24일 전국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일제는 의주 안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철로에 몰려든 환영 인파에 대대적인 검거로 대응했고 이틀간 서울의 전 상가를 강제 철시했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전면을 환영 논설과 광고로 채웠다. ‘미국의원단을 환영하노라’라는 조선어 사설과 ‘Welcome to the Congressional Party’라는 영문 번역 논설을 나란히 싣고 여러 사회단체와 개인, 기업 명의의 영문과 한문 환영 광고를 함께 실었다.
“이제 우리 조선 이천만 민중은 데모크래시(Democracy)를 주장하여 극동에 재(在)하야 그를 실현하고자 희생을 앗기지 아니하노니 (…) 원컨대 형제는 이 조선인의 희망 곳 내적 생명을 본국형제의게(에게) 전하야 우리와 갓치 깃버하며 또한 동일한 이상을 위하야 한가지 힘쓰기를 바라노니”라며 인류적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한민족의 민주주의 실현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 영문 논설 및 해외 지식인 기고 게재, 만국기자대회 대표 파견 등으로 세계와 접촉한 데 이어 1923년 12월 1일 대대적 지면 혁신을 실시하면서 국내외 외국인들에게 민족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 ‘영문란’을 신설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본보의 지면 혁신에 대하야’에 이어 ‘세계에게 일언’이라는 제목으로 첫 영문란 번역기사를 게재해 이 난이 지닌 의미를 뚜렷이 드러냈다. 칼럼은 “세계는 조선 인민에게서 오는 소리를 기다렷슬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고립한 일민족의 진정에 접촉할 아모 기관도 업섯섯다. 우리 편으로 보더라도 세계에 말하고 십흔 수업는 우리 자신의 생활이 잇섯고 또 인류의 양심과 동정의 법정에 제출할 수업는 비통한 사건이 잇섯다”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문 동아일보에 영문란을 두게 한 까닭”이라고 밝혔다.
영문란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칼럼과 조선의 독립 투쟁을 대외에 알리는 기사로 채워졌다. 1924년 8월 14일에는 ‘우리의 민족주의 활동-금광 습격(Our Nationalist Activities-A Gold Mine Attacked)’이라는 제목으로 국경지역에서 시작돼 평안남도와 함경남도로 확대되고 있는 무장독립투쟁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9일 우리의 민족주의 군대(Nationalist Army)가 평안북도 자성의 일본 경찰서(Jap Police Station)로 쇄도했다’는 등의 무장항일투쟁 소식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일본을 비하하는 영어인 ‘Jap’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18일자 ‘국민적 정신생활(National Spirit Lives)’ 제목의 칼럼에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3분됐던 폴란드가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사실을 적시한 뒤 “수많은 다른 나라들도 국민정신이 꺾이지 않은 가운데 존재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의 국가존재에 대한 감정도 예와 다름없이 강력하다. 일본 정부는 세계에 대해 조선이 일본 통치에 만족한다며 평화적 통치를 실시한다고 하나 이는 친일주의자의 잘못된 선전이다”라고 전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는 동아일보의 영문란에 대해 “1920년대 총독부는 영문기관지 ‘서울프레스’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했으나 민족진영이 외국어로 국내의 사정을 알릴 창구는 없었다. 이에 일찍이 눈뜬 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을 대표해 창간 직후부터 영문 보도나 해외 지식인들의 기고를 통해 외국 민족주의자들과 교류를 꾀하고 세계인 속에 조선 독립 여론을 형성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中 쑨원 ‘일제 침략주의 비판’ 기고… 인도 간디 ‘조선 독립지지’ 메시지 ▼
각국 지도자 글 잇따라 게재
“…조선 문제는 매우 곤란한 문제이니 나는 평소의 생각대로 지금 논하면 일본은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 일한합병(日韓合倂)이 조선인의 원한을 맺히게 했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글은 중국 정부를 이끌던 쑨원(孫文)이 1920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기고 중 일부다. 그는 기고를 통해 일제의 침략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이후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들의 글을 잇달아 소개하며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다.
영국의 식민지로 우리 민족과 같은 처지였던 인도로부터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받아 게재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4월 2일에는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기고한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이란 시를 게재했다. 당시 동아일보 주요한 편집국장(1900∼1979)의 번역으로 지면에 실린 타고르의 영문 시는 식민 지배로 움츠렸던 조선 민족의 자긍심을 되살렸다.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가 보내온 조선 독립 지지 메시지도 이에 앞서 1927년 1월 5일자에 실렸다.
1930년 4월 16일 1면에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외국 명사의 축사-조선의 현상(現狀) 밑에 귀보(貴報)의 사명 중대’란 제목의 미국 네이션지 주필 빌 라즈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에서 라즈 주필은 “네이션지는 1865년 창간 이래로 소수민족의 자유, 각 인민의 생활양식의 자유와 군국주의에 대한 항의로 일관했다”며 “동아일보는 조선 민족을 위해 가장 힘있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초지를 관철하라”고 강조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①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이 조선을 방문한 당시 1920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 지면 전체에 국문과 영문으로 쓴 환영 논설과 환영 광고를 게재했다. 논설은 미 의원들에게 ‘조선 민중의 마음에 깃든 민주주의에 주목하여 이 같은 희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함께 힘써 달라’고 요청했다. ② 1923년 12월 1일자에 실린 동아일보 영문란 첫 칼럼 ‘A Message to the World(세계에 일언)’. 조선 민족이 일제에 당한 비통한 사건들을 ‘인류의 양심의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영문란을 신설했다고 밝히고 있다. ③ 김동성 기자가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서 부회장에 뽑힌 사실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1년 10월 23일자). 부회장은 각국 대표들이 받는 당연직이지만 조선도 ‘코리아’라는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았음을 알리는 기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1년 파견된 김동성 기자 “대표석 ‘코리아’ 이름 보고 감격”
1921년 10월 미국 하와이에서 제2차 만국기자대회가 열리기에 앞서 동아일보에 초청장이 왔다. 이 초청장에는 이 대회의 회장이자 미국 미주리대 신문학과장이던 월터 윌리엄스 박사의 명의로 대표 기자를 파견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조선의 대표 기자를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동아일보는 중역회의를 열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영어도 유창한 김동성 기자(1890∼1969)를 대표로 선정하고 출장비 2000원을 책정했다. 동아일보 창간 때 합류한 그는 한국 기자 최초의 ‘특파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 저명인사 20여 명의 창간 축하 메시지를 본보에 게재한 바 있다.
동아일보 사사는 김 기자의 만국기자대회 참석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대회에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은 첫째로 만국기자대회라는 국제회의가 본보를 초청했다는 것이 다만 본보의 명예일 뿐만 아니라 우리 언론계의 광영이 아닐 수 없었고, 둘째로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국가대표로 초청되었다는 감격, 이런 것이 본보를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김 기자는 9월 27일 서울을 출발해 10월 2일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코리아호’를 타고 10월 1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만국기자대회는 이날 개막해 열흘간 계속됐으며 세계에서 200여 명의 기자가 참석했다. 김 기자는 이 대회 부회장으로 뽑혔다. 김 기자는 동아일보 사보인 ‘동우’ 1963년 6월호에서 “회의장 각국 대표석 가운데 ‘코리아’라는 이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봤을 때 격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김 기자는 만국기자대회가 끝난 뒤 본사에 알리지 않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11월 11일부터 워싱턴 대륙기념회관에서 열리는 태평양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사정으로 보아 워싱턴행이 일제 당국에 알려질 때는 호놀룰루 대회 참가 자체도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동우’ 1963년 6월호에 밝혔다.
당시 김 기자의 활약은 한국 기자의 첫 국제무대 등장인 동시에 국권 상실기 세계무대에 ‘코리아’의 당당한 이름을 내걸었던 귀중한 기록이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