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진실은
지난해 8월 이후 북한과의 정상회담 개최 논의 과정에서 협상파 역할을 맡았던 임태희 대통령실장(왼쪽)과 대북 원칙파 입장을 고수했던 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복수의 소식통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이 지난해 8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했을 무렵 북한 문제를 다루는 외교안보라인 당국자들의 입장은 두 갈래로 극명하게 엇갈렸다고 전했다.
한 당국자는 당시 “한반도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북한을 테이블에 앉혀 놓고 변화시켜야 한다”며 ‘전략적 관여(strategic engagement)’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당국자는 “두 차례나 핵실험을 하고 3대 세습을 추진하는 북한과 대화해서 우리가 얻을 것이 없다”며 “북한과 섣불리 대화할 경우 정권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경제 지원을 받아내려는 북측과 이를 조건으로 남북 간 현안을 풀고자 했던 임 장관의 비선라인의 활동으로 남북문제는 일사천리로 풀리는 듯했다. 임 장관은 조문단의 방한에 역할을 했고 이후 산적한 현안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당시 정부 안팎에서는 조문단 방문 이후 남북 현안들이 속속 해결되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바로 임태희 비선라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0월 싱가포르 비밀회담에서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조건으로 대북 경제지원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 대화를 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해 왔다. 임 장관이 주저하자 김양건 부장은 “사인을 받아가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임 장관의 싱가포르행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비선라인의 활동은 중단됐다. 임 장관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정부 쪽에서 언론에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후 원칙파의 무대가 왔다. 현인택 장관은 비선 합의만을 근거로 정상회담을 발표할 수는 없으며 정부 간 공식 라인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이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공을 세운 임 실장을 배제하고 이번에는 통일부와 국가정보원 등으로 구성된 정부협상단에 추가 협상을 지시했다.
11월 10일 양측 협상팀이 예상치 못했던 대청해전이 발발했고 11월 14일 다시 만난 양측은 “더 할 말이 있느냐. 나는 할 말이 없다”는 통보만 남기고 회담장을 나갔다.
회담이 결렬되자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정부 내 협상파는 “관료들이 공을 세우려고 욕심을 내다가 우리가 다 해놓은 밥을 엎질렀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반면 원칙파는 “북한을 잘 모르는 비선이 합의한 대로 정상회담을 했으면 북한에 이용만 당하고 정권 지지층이 이반됐을 것”이라며 “그 정도로 막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반박했다.
북한은 현 장관 등 정부 관료들이 이 대통령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 듯 지난해 12월 여권 중진인사 A 씨 등을 통해 “임태희 비선라인과 합의한 내용을 다시 논의하자”고 전달해 왔다. 청와대 당국자는 그 같은 내용을 전한 동아일보 보도(2일자 A1·3면 참조)에 대해 2일 “우리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해 정부가 당분간 비선을 통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지 않을 방침을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협상에 대한 이 대통령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선라인을 통해 얻을 것을 다 얻은 뒤 일방적으로 협상대표를 바꾸고 조건을 높인 것은 협상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김양건 부장은 “한국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느냐”며 역정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