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인간이라는 한 그루 나무다. 나에게도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의 그늘처럼 인간이라는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뙤약볕이 내리쬐어도 내 그늘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드러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함으로써 내 그늘의 의미와 가치를 도외시해온 탓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그늘을 휴식과 위안의 그늘, 나눔과 화해의 그늘로 인식하기보다 고통과 절망의 그늘, 시련과 상처의 그늘로만 인식해온 잘못이 크다. 내가 내 그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내 그늘을 찾아와 쉴 수 있을까.
햇빛만 있다면 세상은 사막으로
물론 우리의 삶은 그늘과 햇빛이라는 양면성 속에 존재한다. 햇빛이 있어야 그늘이 있고 그늘이 있어야 햇빛이 있다. 그늘과 햇빛은 동질의 존재다. 그런데도 나는 줄곧 햇빛만을 갈구했다. 햇빛이란 내가 소망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속 햇빛만 원한다면 내 인생이라는 대지는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만다. ‘항상 날씨가 좋으면 곧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스페인 속담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집트 ‘백사막’에서 하룻밤 자본 적이 있다. 초저녁엔 하늘 높이 찬란하던 별이 새벽이 되자 너무나 지상 가까이 내려와 손만 뻗치면 곧 잡을 수 있을 듯했다. 먼 지평선 끝에서는 샛노란 오렌지를 딱 반으로 자른 듯한 반달이 떠올라, 모래 위에 낡은 담요를 깔고 오리털 점퍼를 껴입고 누워 바라보는 사막의 밤하늘은 너무나 신비하고 황홀했다. 어느 별 끝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도 된 듯했다.
간혹 여행객의 신발을 물고 간다는 사막여우가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자꾸 찾아와 신비스러움을 더해주었다. 그토록 잠 못 이루는 황홀한 사막의 밤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일행 중 아무도 하룻밤 더 자자는 사람은 없었다. 사막의 밤은 아름다웠지만 너무나 춥고 배고팠기 때문이다. 모닥불을 피웠지만 추위를 견딜 수 없었으며, 밥을 했지만 모래가 들어가 먹을 수 없었다.
햇빛만 원한다면 인생은 이런 사막이 되고 만다. 때로는 고통의 비바람이라 할지라도 불어야 하고 절망의 눈보라라 할지라도 몰아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대지에서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숲의 그늘에 앉아 새들과 함께 내가 쉬었다 갈 수 있다. 계속 햇빛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삶의 그늘을 소멸시켜 버리는 죽음의 햇빛을 원하는 일이다.
누구든 그늘 없는 삶은 없다. 부자에게도 그늘이 있고 빈자에게도 그늘이 있다. 그늘을 어떻게 여기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부자는 겸손과 나눔의 그늘로 만들면 좋고, 빈자는 부처님 말씀대로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는 자족과 감사의 그늘로 만들면 좋다. 언젠가 읽은, 큰아들의 장례식과 작은아들의 결혼식을 하루에 동시에 치른 부부가 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그늘을 인내와 순응의 그늘로 만들어간 이야기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늘 없는 사회는 없지만 짙게 깔린 갈등과 부정의 그늘을 이해와 긍정의 그늘로 만들어가는 일은 모두의 책무다. 우리 사회와 국가 지도자가 여름의 나무 그늘처럼 그늘이 많다면 국민은 편히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누구든지 찾아오기만 하면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누구는 와도 되고 누구는 오면 안 된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올해도 나무 그늘의 품은 어머니처럼 넉넉하고 시원하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