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리처드 세넷 지음·김홍식 옮김/496쪽·2만5000원/21세기북스
로스앨러모스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업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무언가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띄면, 우리는 일단 달려들어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그 기술이 성공한 뒤에야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따져본다. 원자폭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일지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자신이 인류를 멸망시킬 무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실험을 진행했다. 호기심 많은 인간이 순전히 흥분에 홀린 채 일을 저지르는 형국이다. 죽음의 수용소를 기획한 나치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도 이런 경우다. 아렌트는 관료로서 시키는 일만 했다는 그를 ‘일상의 탈을 쓴 악’이라고 표현했다.
직업상 손을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굳은살은 두꺼워지면 감각이 둔화될 것 같지만 실제론 신경 말단을 보호해 손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한다. 장인의 굳은살은 정밀한 작업을 위한 또 다른 도구다. 사진 제공 21세기북스
저자가 보기에 일을 훌륭히 해내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이 원초적 정체성은 별다른 보상이 없어도 일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고 별다른 이유 없이도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바로 장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장인의식’은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들어버린 생활방식으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기본적 충동이며,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 해내려는 욕구라고 그는 설명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의사, 예술가 등의 작업에도 장인의식은 살아 있다.
리눅스 세계에서는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찾는 일이 거의 순간적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차이는 크지만 고대의 도공과 현대의 리눅스 프로그래머는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찾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실험처럼 이어진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리눅스 프로그래머와 비교할 때 고대의 도공보다는 현대의 관료집단이 훨씬 차이가 크다. 관료들은 정책을 저울질할 때 목표와 절차, 그리고 희망하는 결과가 미리 정해지기 전에는 착수하기를 꺼린다. 이러한 방식은 ‘닫힌 지식 시스템’이다. 수공업 역사에서 닫힌 지식 시스템은 대개 수명이 짧았다.
근대 이래 수공업 장인이 직면한 가장 큰 딜레마는 기계였다. 기계는 과연 우호적인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거리를 빼앗는 적인가. 몇몇 계몽주의 사상가가 보기에 기계의 우월성은 인간의 절망을 초래할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육체를 이해하는 중세적 관점을 흔들어놓은 세 가지 도구는 망원경과 현미경, 메스였다. 특히 현미경과 메스는 충격 그 자체였다. 1590년 네덜란드의 렌즈 연마사 요한 얀선이 발명한 것으로 추정하는 복합현미경(렌즈가 두 개)으로 인류는 눈으로 볼 수 없던 새로운 세계에 눈떴다. 벨기에의 의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1543년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간하며 메스를 절묘하게 쓰는 손 기술을 연구했다. 메스는 예리해서 손을 조금만 잘못 놀려도 수술에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는 손 기술을 통해 메스 사용 매뉴얼을 만든다면 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노동의 윤리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책을 마친다. 그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은 장인정신의 핵심이며, 그 자부심은 윤리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예로 든다. 생각 없이 무언가 만들어 내는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는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화려한 해악’이고, 절름발이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수줍은 일꾼’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이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