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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광복 후의 한일 관계]⑨걷어내야 할 제국주의의 흔적

입력 | 2010-08-07 03:00:00

일제, 임나일본부설 뒷받침하려고 가야 중요성 일부러 축소




일제가 조작한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역사학계에서 늘 논란의 중심이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본격적인 가야사 연구가 늦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 속 대고분군 유적에서 알 수 있듯 가야는 철기생산의 중심이자 통상국가로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였지만 여전히 가야사는 삼국시대 역사에서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인은 여타 식민지의 야만하고 반(半) 개화한 민족과 달리 독서문화의 문명인이 많고, 고래(古來)로 사서(史書)가 많아 독립국의 옛 꿈을 추상(追想)하는 폐단이 있으며….” 조선총독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찬기관이었던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에서 밝힌 조선사 편찬 목적이다. 입맛에 맞는 조선사 서술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꺾고 통치를 수월하게 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925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총독부 직할 조선사편수회는 1938년 ‘조선사’를 완간했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는 한국사의 시작을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로 설정하고 고조선은 위만과 기자에서 시작한 나라로 서술해 중국사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등 한국사를 왜곡했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조선의 국운은 늘 외부가 결정해 왔다는 타율성론 등 이른바 식민사관도 이 시기에 확산시켰다.

광복 이후 한국 사학계는 이 같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 3월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한 것은 그 대표적 성과 중 하나다. 그러나 일제가 남긴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광복 이후 임나일본부설이나 일선동조론 등 개별 학설의 왜곡을 밝히는 연구는 다양하게 이뤄져 왔지만, 일제의 ‘조선사’ 서술 전체를 분석하고 그 사관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남재우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7월 22, 23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식민주의적 한국고대사 인식의 비판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논문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 연구와 그 극복’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남 교수는 “광복 이후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의 커다란 쟁점이 임나일본부였으며, 이것은 우리 학계로 하여금 가야사 연구를 기피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나일본부설이 왜곡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연구를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가야사 전반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삼국시대’라는 표현 자체가 일제 잔재라는 지적도 있다. 가야를 일본의 속국으로 설정하기 위해 삼국만 강조하면서 가야의 중요성을 일부러 축소했다는 것이다. 가야는 실제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국가로 철기 생산의 중심지이자 일본과 교류도 활발했다. 신라와 대립할 정도의 국력과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데도 중고교 국사 교과서 가야사 서술은 2, 3쪽뿐이며 여전히 가야는 일반인들에게 ‘신비의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남긴 인종차별의 유산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내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준식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식민지 파시즘의 유산과 극복의 과제’에 실은 논문 ‘식민지 파시즘의 유산과 극복의 과제-인종주의를 중심으로’에서 “아시아 여러 민족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일제는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아시아 내 위계를 세우고 서열화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1942년 제국의회 연설에서 도조 히데키 당시 일본 총리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내부적 중핵(일본, 조선, 만주, 중국, 태국, 베트남), 일본의 직할령(홍콩, 말레이반도), 독립 예정 지역(필리핀, 미얀마) 등으로 구분해 위계를 설정했다. 이처럼 일제는 전쟁을 준비하며 식민지 종주국과 식민지의 일체화를 내세웠고, 이에 따라 일부 조선인 사이에 아시아의 다른 인종, 다른 민족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갖는 경향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전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민족 간 순위를 강조하면서 우리도 다른 민족을 열등하게 대하고 배척하는 차별 의식을 갖게 됐다. 우리도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이상 이 차별의식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하게 제국주의의 흔적을 지웠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흔적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한자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승부’ ‘취입’ ‘특히’ ‘관행’ ‘입장’ ‘역할’ ‘의의’ ‘가시화’ 등이 이 같은 사례다. ‘승부’는 ‘승패’ ‘결판’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취입’은 ‘녹음’으로 고쳐야 한다. ‘…에 의하여’ ‘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의’ ‘…에 비해’ 등도 우리가 여전히 자주 사용하는 일본식 어법이다.

마을 구성원이 함께 하는 민속놀이도 일제는 민족정신 고양을 우려해 억눌렀다. 대신 화투 같은 일본 여가문화를 보급한 결과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건너온 화투를 명절에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파벌을 형성하는 정치문화와 주입식 교육, 권위주의적 관료문화 역시 ‘일제 잔재’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일면들이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 “일본해 표기 100년 지나도록 위력… 바로잡을 일 태산이죠” ▼
‘동해’ 표기 활동 펼치는 반크 박기태 단장


독도와 동해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세계지도를 들고 있는 박기태 반크 단장. 사진 제공 반크

“워싱턴의 홀로코스트박물관 등 주요 기관과 단체에 있는 지구본과 지도에도 여전히 ‘일본해’라고만 표기한 게 보이더군요. 한일강제병합 즈음 슬그머니 등장한 일본해라는 표기가 100년이 지나도록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 정부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연수 중인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VANK) 박기태 단장(36)은 최근 통화에서 “일본에 의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크가 사이버외교사절단 회원들과 함께 중점적으로 벌여온 사업이 바로 동해 표기 바로잡기. 박 단장은 “일제가 우리 외교권을 박탈했던 100여 년 전 즈음 동해 표기도 함께 없앴다는 측면에서 이는 한일강제병합에 따른 대표적인 상흔”이라고 말했다.

‘일본해’ 표기나 독도 영유권 표기 등은 일본 교과서에 실린 것이 외국 교과서나 책에 인용되는 과정을 통해 확산된다. 이에 따라 외국의 웹사이트에도 이 같은 표기가 퍼져나간다.

그나마 반크 회원들의 활동으로 ‘동해’ 표기를 함께 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동해를 함께 표시하는 주요 웹사이트 비율이 약 3%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24%로 늘었다. 2002년 세계적인 지도제작회사 ‘월드아틀라스’가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倂記)하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세계 최대 교과출판사인 ‘돌링카인더슬리’가 반크 회원인 여고생의 지속적인 동해 병기 요청을 받아들였다. 최근에도 반크 홈페이지에는 미국 MSNBC 방송국 웹사이트에 동해 단독 표기를 성사시켰다는 등 회원들의 활약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일제강점기 왜곡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 단장은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여러 나라 연수생들과 얘기를 해보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여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었기 때문에 선진화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1999년 설립된 반크는 현재 유료회원 1만8000여 명과 무료 회원 2만 명, 외국인 회원 1만 명이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한국을 알리고 한국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시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지워진 아픈 과거 : 남산 신궁-총독부 건물
▼ 교훈으로 남은 역사 : 서울역-시청-조선은행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남산 공원, 84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광화문. 일제강점기 ‘조선을 일제 치하에 둔다’는 상징성을 띤 건축물들이 들어섰던 곳이다. 일제는 1925년 조선의 수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웠다. 광복 때 1141개에 이르렀던 일본 신사(神社)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광화문을 헐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훼손하면서 들어섰다. 1925년 서울 한가운데 세워진 서울역은 쌀 등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는 통로였다.

광복 이후 일제가 세운 건물 중 상당수는 전쟁으로 파손되거나 과거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조선신궁은 1945년 광복 직후 총독부가 신궁에 신물(神物)로 두었던 어영대(御影代·거울)를 일본으로 옮기고 그해 10월까지 건물을 해체하면서 사라졌다. 총독부 건물은 광복 후에도 정부 청사와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 1995년 광복절에 철거됐다. 중앙 돔 위 돌 첨탑은 남겨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옮겨 전시했다. 명동 입구에 있던 일제강점기 근대 건축물인 경성우체국은 6·25전쟁 때 파손돼 사라졌다.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건물 자체를 근대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 교훈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2008년부터 리모델링 중인 서울시청은 일제가 1926년 경성부청사로 지은 부분을 일부 보존하기로 했다. 청사 본관동의 중앙홀, 돔과 시장 집무실은 보존하고 앞면(파사드)과 태평홀은 보강공사 후 복원하기로 했다. KTX 서울역사가 생기면서 사용이 중단된 옛 서울역사도 1925년 신축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다. 서울역의 80년 역사를 모두 담기 위해 건물 뒤쪽 외벽의 6·25전쟁 때 총탄 자국도 그대로 남긴다. 옛 서울역사는 공연이나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그 외 아직 남아있는 건축물로는 광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쓰다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쓰고 있는 부민관(1935년 건립),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조선은행 본점(1912년 건립) 등이 있다. 1914년 조선철도국이 설립한 조선호텔은 개축해 호텔로 운영하고 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