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터넷진흥원 사이트에 마련된 주민등록번호 클린센터. 주민번호 도용 사실을 1차로 확인할 수 있다.
평소 '피곤하게 산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고발정신이 투철한 기자. 출근길에 초등학교 길가에 뿌려진 성인광고 전단지를 보고 인근 경찰서 아동청소년과에 전화를 걸어 신고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어디에선가 누출된 개인정보 침해에도 '피곤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등급 관계없이 당일 2000만원까지' 'OO캐피탈 김OO 팀장입니다' 등 휴대전화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받아봤을 스팸 문자메시지 하나도 그냥 보고 넘기질 못한다.
기자는 휴대전화에 스팸 문자메시지가 뜰 때마다 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인터넷 사이트: http://spam.kisa.or.kr/spam/jsp/spam_1010.jsp, 신고전화: 118 혹은 1336)에 꼬박꼬박 신고한다. 그런데 최근 이 사이트를 둘러보다 '주민등록번호 클린센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웬만해선 개인정보가 누출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인터넷 사이트 회원가입을 잘 하지 않아 큰 걱정은 안했지만 한 번 검색해 봤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트 주소가 첫 화면에 떴다. 올해 4월 7일 회원가입을 한 것으로 나왔다.
해당 사이트의 주소를 눌러보니 온라인 액션게임 D의 첫 화면으로 연결됐다. 입사한 뒤로는 온라인 게임을 완전히 끊은 데다 D는 처음 들어본 것이라서 포털 사이트에 검색했다. 최근 게임 검색어 5위권에 오르내리는 인기 게임이다.
개인정보를 넣고 아이디를 찾아봤다. 역시 예상대로 '해당 아이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떴다. 벌써 써먹을 대로 써먹고 버린 모양이다. 중국 등 해외에서도 한국인 주민번호를 도용해 게임 등 각종 사이트의 인터넷 계정을 만드는 불법 행위가 만연하다고 하니 범인을 찾기도 쉽지는 않을 터.
그래도 혹시나 국내에 범인이 있어 추적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D를 제작한 업체 N사에 전화를 걸어봤다. 업체의 한 직원은 "그런 업무는 우리가 처리할 수 없으니 D게임 상담 대표전화에 걸어 문의하라"며 번호를 알려줬다.
결국 한 상담사가 전화를 받았다. "누가 내 주민번호를 도용해 그쪽 게임 사이트에 올해 4월 가입한 것이 조회된다. 지금 아이디를 검색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뜨니 가입 관련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상담사는 "확인을 위해 주민번호와 신분증(운전면허증) 작은 사진 아래쪽에 적힌 일련번호를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내 주민번호 도용 내역을 알고 싶다는데 신분증에 적힌 일련번호까지 불러 달라니 꽤나 복잡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요구하는 내용을 일단 모두 알려 줬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
"이 주민번호로 가입한 회원은 탈퇴한 지 한참 지났습니다. 탈퇴한 지 14일이 지난 회원가입 정보와 이용 내역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입한 적이 없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용한 것이라고 설명해도 상담사는 "탈퇴 14일이 지나서"만 반복하며 도용 피의자의 이용 내역 알려주기를 거절했다. 업체 측에서야 주민번호 도용이 됐든 말든 회원수만 늘면 좋은 것 아닌가. 결국 D게임 업체 측과 말해봤자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버테러대응센터 대표번호에 전화를 거니 "계시는 곳 관할 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 직접 신고해야 한다"고 답하며 번호를 알려줬다. 관할 경찰서 사이버수사대로 전화를 걸어 이미 줄줄 외우다시피 한 주민번호 도용 사정을 또 다시 설명하고 "온라인 게임 D의 제작사인 N사로부터 주민번호 도용 관련 내역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 측에선 사설 인터넷 보안 사이트가 유료로 제공하는 로그인 내역 자료를 출력한 뒤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야 한다며 사이트 한 군데를 안내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조회할 수 있는 회원가입 자료만으로 주민번호 도용을 신고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지만 "사설 보안 사이트가 제공하는 로그인 자료가 있어야 수사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결국 내 주민번호 도용을 추적하려면 사설 인터넷 보안 사이트에 주민번호를 또 입력해서 회원으로 새로 가입한 뒤 이 사이트에 돈을 지불하고 로그인 내역을 전부 뽑아 경찰서를 가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자 '돈 쓰고 내역서 뽑아봤자 수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귀찮아서 안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뒤 주민번호 도용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느라 열었던 인터넷 창을 전부 닫아버렸다. 창을 닫기 전 '주민등록번호 클린센터'에 나와 있는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정 사용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만약 타인의 성명,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이용자 분들은 지금 즉시 명의 도용을 중단하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중단되시길 바라면 신고 절차라도 좀 쉽게 해 놓던지…."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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