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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8·15]박조열 극작가

입력 | 2010-08-13 03:00:00

소련군 진주로 시작된 분단… 전쟁… 생이별…
함흥의 광복엔 기쁨만큼 큰 슬픔이…




그해에 나는 북한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던 함남공립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 시대에 도(道)의 이름을 딴 공립중학교는 도의 대표적 명문교였다. 서울의 경기중학교, 대구의 경북중학교, 부산의 경남중학교가 그랬듯이. 또 하나, 그 시대엔 중산층 이상 계층의 자녀가 주로 전문학교나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중학교를 지원하고 가난한 계층의 수재는 졸업하자마자 취직이 되는 사범학교를 지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포부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간직했던 몽상소년이었다.

몽상에는 성장환경이 작용했을 터다. 함흥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40가구가 될까 말까 한 박씨 집성촌에서 유소년기를 보내면서 일제의 만행을 생생하게 목도했다. 한밤중에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동네 청년을 잡아가는 와중에 여자들의 아비규환, 온 동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 여럿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소리….

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탓으로 소달구지에 실려 오던 동네 형님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한 백부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했다는 5촌 당숙에 얽힌 얘기…. 그리고 머슴방에 묶인 동네 청년 중 누군가가 신나게 들려주던, 축지법을 구사하며 일본 경찰을 골탕 먹이는 ‘김일선’ 장군(훗날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을 지칭하는 건 아니었다)의 황당한 무용담이 어린 마음속에 침잠해서 포부를 키웠음에 틀림없다.

광복되던 해인 1945년 봄에 몽상소년의 꿈을 자극하는 큰일이 생겼다. 평양중학교에서 전학해 온 급우 한 군(그의 이름은 잊었다)이 내게 엄청난 내용이 담긴 비밀 팸플릿을 몰래 건네주었다. 제목은 ‘재선(在鮮) 내지인(일본인을 가리키는 뜻)에게 고함’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최근 전세가 악화하면서 조선인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런 경우에 대비해 일본인들이 해야 할 행동요령을 열거하고 있었다. 어디서 얻은 거냐고 물으니 “일본인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는 우리 형이 몰래 빼내온 것인데, 그동안 너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네가 제일 믿음직스럽고 가장 흥미를 가질 것 같아서” 건넨다는 것이다.

나는 200m쯤 떨어진 곳에 사는 함남일보사 기자인 박환국 씨를 찾아가 거두절미하고 팸플릿을 건넸다. 중학교 6년 선배였던 박환국 씨는 그 무렵의 내가 가장 따랐던 정신적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매우 직정적(直情的)으로 문학의 세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내게 독서 지도를 하면서 아껴주던 문학청년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이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만 했다. 그 팸플릿은 나로 하여금 ‘불온한 행동을 하라’고 일러주는 듯한 자기암시에 빠지게 했다. 짐작하건대 바야흐로 불온한 움직임이 조직되고 있으니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충동을 이기기 어려웠다.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학우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마음먹고 첫 번째 대상을 P 군으로 정한 뒤 넌지시 의향을 탐색했다. 놀랍게도 그는 마치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나 있었던 듯이 아주 어른스러운 말투로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해”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독립운동가의 포부는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1945년 봄부터 8월까지 수개월은 학교 수업도 폐지되다시피 했다. 상급생은 비행장 활주로 확장공사에, 우리 저학년은 함흥 동쪽의 산록에 폭탄을 저장하기 위한 호 파기 작업에 동원되었다. 나는 자주 결석하면서 8·15 그날까지 갖가지 소설을 난독(亂讀)했다. 그 무렵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 19세기 러시아 작가를 탐독했다.

8월 15일 그날에는 나도 작업장에 나가 있었는데, 정오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예고를 들었기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너무나 큰 감동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냥 멍하니 학우들을 둘러보고, 하늘을 보고 마치 낯선 땅에 왔듯이 주위를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함흥 시내 번화가를 관통하면서 걸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대오를 지은 일본군의 왕래가 빈번했다. 아마도 질서 유지를 위해 시민을 위압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 같은 상태는 소련군이 함흥 시내로 진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이 달라졌음을 널리 알리는 첫 번째 큰 사실은 함흥형무소에 수감당한 한글학회 사건 관련자가 8월 16일에 석방되어 함흥시민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상경한 일일 것이다. 박환국 씨를 통해 그분들의 상경 열차 시간을 알고는 있었지만 역에는 못 나갔던 게 지금도 아쉽다.

소련군이 함흥시내로 진주한 8월 20일 밤, 공회당 앞에 운집한 군중과 먼지를 뒤집어쓴 소련 병사들이 악수를 하고 포옹하기도 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나도 눈물을 흘렸다. 소련군에 대한 감격은 이내 공포와 증오로 돌변했다. 도처에서 부녀자 강간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소련군의 선봉부대에는 형벌 사면을 조건으로 군에 간 병사들이 많아 그 질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광복된 지 한 달여 후 우리 집에는 불안한 일이 생겼다. 함흥 집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갔더니 소작인들이 소작료 거부운동을 벌였다. 농민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다녀온 일가의 형님은 아버지에게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라”고 권유하고 갔다고 한다. 고향에 갔더니 바로 그 형님이 나를 몰래 불러 “네 이름으로 돼 있는 땅만이라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아버지를 설득하라”고 했다.

그러잖아도 그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명의의 논은 모조리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던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 같은 생각을 말했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아버지가 대로하는 바람에 나는 함흥의 친지 집을 전전하면서 얼마 동안 기식해야 했다. 당시 나는 소설뿐만 아니라 좌경서적도 읽으면서 공감했던 철없고 소박한 ‘좌경소년’이기도 해서 그다지 속상해하지도 않았다.

얼마 후 수립된 북한정권에 의해서 이듬해 3월 토지개혁으로 땅을 모조리 몰수당한 뒤 어느 날 아버지는 내 앞에서 약간 거나하게 취해서 “그때 네 말대로 할걸 그랬어”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일화를 소개한 건 8·15가 광복의 의미만을 지니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환의 기점이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내가 따랐던 박환국 기자의 궤적도 여러 면에서 8·15와 관련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광복 전까지는 장발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장발을 금지했으므로 그의 장발 고집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 수일 후에 그는 아예 삭발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공산당이 주도하는 문학동맹과는 별도로 연소(年少)문학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함흥극장이라는 영화관에서 개최된 창립총회는 나도 참석해서 구경했는데, 그 자리에는 한설야(소설가·북한에서 김일성 전기를 처음 썼고 조소 문화협회 회장도 지냄)가 초청되어 축사를 했지만 문학동맹 외의 문학 조직을 마땅치 않게 여긴 공산당의 프락치에 의해 문학동맹에 흡수 와해되었다. 화가 난 박환국 씨는 월남해서 한때 신문기자로 일했는데, 원체 직정적인 그에겐 남한도 마땅찮은 점이 많아 좌경해서 북으로 다시 갔다고 들었다. 그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나는 혼자 월남해야 했다. 북에 남겨둔 혈육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41년 후인 1991년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여동생 넷 중에 하나만 살아남아 있었다.

‘8·15와 나’에 대한 글을 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도 혈육에 대한 것이었다. 혈육과 헤어진 것은 6·25전쟁 때문이었고 이 비극적인 전쟁은 남북 간의 이데올로기 충돌로 생겼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남북의 충돌은 8·15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 이미 씨가 자라지 않았던가.

내게 있어서 8·15는 나와 비슷한 행로를 걸어온 많은 동포와 함께 남북 분단과 6·25전쟁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은 수많은 사람에게 광복이 준 기쁨의 크기 못잖은 슬픔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