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 자처한 크메르루주 전범
프놈펜에서는 누가 재판을 할까. 잘 모르는 독자들도 1975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캄보디아에 불운한 비극이 덮쳤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알 것이다. 이는 캄보디아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정권을 세우려 했던 미국의 시도가 부른 민족주의적 저항은 아닐까. 대학살은 크메르 문화의 특유한 유산은 아닐까. 그러나 히틀러가 자신이 행할 범죄들을 사전에 묘사했던 것처럼 폴 포트는 새 민족을 만들기 위해 국민을 학살하겠다고 예고했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폴 포트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했고 캄보디아 왕조의 새로운 계승자 같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려고 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현실 공산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피의 진창 속을 걸어 다닌다. 러시아 지주계급의 몰살, 중국의 문화혁명, 북한과 쿠바의 지식인 말살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프놈펜에서 벌어지는 재판은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재판하는 첫 번째 케이스다. 그러나 현실 공산주의는 나치즘이나 파시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켰지만 정작 그 범죄가 일어난 곳에서 재판을 받은 적은 없다. 평양, 아바나, 베이징, 하노이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모호한 진보주의로 면책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런 동정론은 한국의 일부 지식인과 젊은층의 향수,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잃어버린 곳에서도 사회민주주의자, 사업가, 정치적 리더로 변신해가며 그들만의 면책권을 만들어왔다.
미래 평양에서 재판 열린다면…
희생자들이 주도하는 현실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재판은 일단 캄보디아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미래에 평양에서 한국인 희생자들에 의해 제기된 공산주의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것을 상상해 봐야 한다. 베이징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이 재판들이 열리면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내세우는 알리바이의 유사성에 놀랄 것이다. 사방에서 나타난 용기 없는 피고인들은 찾을 수 없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던 꼭두각시로 묘사될 게 분명하다. 프놈펜 재판에서 나타난 현실 공산주의의 이상한 특징은 어떤 공산주의자 간부도 더는 공산주의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메르루주는 마르크스와 레닌과 마오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보다는 변절자로 끝나기를 택했다. 크메르루주가 보여준 이런 비겁함은 공산주의를 다시 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