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감독 조원희가 본 유해진
유해진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 한 일식집의 좁은 룸이었다. 예전에 영화 기자를 하던 시절에는 10미터 밖에서 그를 볼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가깝게 클로즈업으로 그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놀랍게도 ‘곱다’는 것이었다. 우선 관리를 했다기보다는 원래 고운 피부, 섬세한 손이 눈에 띄었다. 직접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손이 ‘잘생긴’ 사람은 양조위 이후 처음이었다. 유해진은 그 섬세한 손으로 가방에서 뭔가 꺼냈다.
얼마전 건넨 ‘죽이고 싶은’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시나리오의 몇몇 부분에 궁금한 점이 있다며 A4지 뭉치를 뒤적거렸다. 원고 빈틈 사이로 깨알같은 메모가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 시나리오를 그냥 읽고 끝낸 것이 아니라 분석까지 마쳤던 것이다.
보통 한 테이크의 촬영이 끝나면 모니터로 다가와 자신의 연기를 확인하는 다른 연기자와 달리, 그는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로 확인하지 않았다.
오로지 세트장 밖에 놓아둔 자신의 간이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심심할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전체를 통째로 외운 시나리오를 보면서 자신의 배역과 드라마의 상황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영화의 연출자인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보통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하는 연기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정형화된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야구에서 타자들이 배트의 중량을 늘이는 추를 달고 스윙 연습을 하다가 타석에 들어설 때는 그것을 떼고 나서듯, 유해진은 자신이 준비했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카메라 앞에 서는 듯 했다.
강인한 동시에 유연한 연기. 적어도 배워서 하는 연기, 혹은 그냥 선천적으로 잘 하는 연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설명이 불가능한 자신만의 연기. 패턴이란 없는 불규칙적인 연기. 단언컨대 그런 연기를 하는 사람은 유해진 밖에 없다.
어느새 나는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그의 거룩한 마력에 빠져있는 팬이 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원희 (영화 ‘죽이고 싶은’ 감독)
영화 전문 기자, 영화평론가, 영화 프로그램 구성작가, 방송인 등 전천후 활동으로 주목받은 르네상스적 인간. 스스로 인생의 종착역라는 영화 감독의 길에 들어서 예전보다 반 이하로 줄어든 수입에 허덕이고 있는(?) 나이 많은 신인 감독. 타고난 학습욕 덕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전문사 과정에도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