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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편지/강노상]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느긋한 그들

입력 | 2010-08-23 03:00:00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는 레이노사는 멕시코 땅이면서 미국 텍사스 주에 인접한 멕시코 수출자유지역이다. 미국과 멕시코가 생산 공조를 위해 1965년부터 시작한 국경지대 산업화 프로그램에 따라 기업에 면세혜택을 주면서 수출품 가공 조립 공장을 유치해 운영한다. 국경도시인 만큼 미국에서 멕시코로,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매일같이 출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국경을 통과할 때 신분 확인 등의 절차 탓에 국경 지역은 늘 분주하다. 기다리는 시간은 짧으면 30분, 길면 2시간 정도 걸린다.

길게 늘어선 차량 속에 있다 보면 기다림에 지쳐서 속이 탈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멕시코 친구 대부분은 화를 내거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운 표정까지 보이면서 기다린다. 멕시코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조언을 했다. 기다리는 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재미있게 활용하는 것이 기다림에 지쳐서 애를 태우는 일보다 효율적이라는 대답이다.

이같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문화는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5년 전 스페인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스페인 친구 한 명과 집 근처로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은 상영관이 25개 있는 복합 상영관으로, 차량을 동시에 4000대 이상 세울 수 있는 초대형 극장이었다. 영화 시작 2시간 전쯤 영화관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영화관과 가까운 곳이 아닌 외곽 주차장만 문을 열어놓았다. 걸어서 영화관까지 10분간 걸어야 할 정도로 먼 거리였다. 함께 만난 스페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여긴 원래 그렇게 하는데 뭐가 이상하지?” 왜 가까이 있는 주차장은 열어 두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참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곳은 급한 사람이 사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 상영시간이 임박해 도착하는 사람에게 영화관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 주차장을 열어주는 식이었다. 일찍 온 사람은 시간도 많으니 영화관에서 먼 곳에 차를 세우고 여유롭게 걸어올 수 있지만 영화 상영에 임박해 온 사람은 영화관 가까이 세울 수 있게 배려하는 의도였다. 먼저 왔으니 좋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논리였다.

우리처럼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된 사람은 이런 문화를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여유가 더 합리적이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매일같이 국경에서 ‘검문과의 전쟁’을 하다 보니 이곳 사람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외국어 공부를 할까, 전화로 친구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할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여유와 지혜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강노상 LG전자 멕시코법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