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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 20선]항해와 표류의 역사

입력 | 2010-08-25 03:00:00

◇ 항해와 표류의 역사/김영원 외 지음/솔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에 표착했다가 송환되어온 사례는 1000건을 웃돌며, 사고 당사자인 조선인의 숫자는 1만 명에 가깝다. 반면 일본인이 조선에 표착한 사고는 이의 1/10 정도에 불과하다. 조선인의 경우 1년 평균 4건에 가까운 사고를 당한 셈으로 비록 사고이기는 하지만 일본 땅을 밟은 횟수로만 본다면 외교사절인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횟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하멜과 비즈니스를 했더라면…

바다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열린 공간인 동시에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항해가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열어가는 것이라면 표류는 의도하지 않게 그 닫힌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은 거창한 제목과 달리 한반도에 국한한 항해와 표류의 기록과 유물, 지도 등을 360쪽에 꼼꼼히 담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실린 가야국 왕비 허황옥과 신라의 임금이 된 석탈해 등의 기록부터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과 일본의 교류기록을 담은 대마도 종가(宗家)문서, 1901년 외국인으로 제주도 한라산을 최초로 등정해 고도(1950m)까지 측정했던 독일 지리학자 지크프리트 겐테의 기록을 망라한다.

특히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 지 350주년을 기념해 제주박물관에서 발간한 책인 만큼 제주도와 네덜란드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 담겼다. 제주 관련 기록 중에는 제주 무속신앙의 총본산 격인 송당 본향당의 여신인 금백조와 그의 아들 궤내기또(천자또마노라)에 얽힌 신화가 흥미롭다.

금백조는 강남 천자국(天子國)에서 표류해 제주로 들어와 사냥꾼 소천국과 결혼해 농경문화를 전파한 농경의 여신이자 가정안녕의 수호여신이 된다. 금백조와 소천국 사이에서 태어난 궤내기또는 아비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나 용왕국에 표착했다가 강남 천자국의 변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영웅으로 김녕마을 궤내기굴에 정좌한 해신이 된다.

이처럼 고대의 신화나 전설, 역사를 살펴보면 항해와 표류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문명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그것은 우연한 표류로 시작해 적극적 항해로 발전하는 패턴을 띠었다. 하지만 중세 이후 한반도는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에 경도되면서 일방적 표류를 쌍방향적 항해로 꽃피우지 못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7, 18세기 200년간 세계 바다를 제패했던 네덜란드와의 해양교류다. 일본은 1600년 네덜란드 선박 데리프테호가 일본 규슈에 난파된 사건을 계기로 1609년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와 공식적 무역통상 약정을 맺는다. 이런 교류가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는 난학(蘭學)으로 발전한다.

반면에 한국은 1627년 벨테브레(한국명 박연) 등 3명과 1653년 하멜 등 36명의 네덜란드 선원이 표류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상의 기회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박연은 조선에 귀화해 홍이포(서양식 대포)와 수석식총(심지에 불을 붙이는 조총을 개량해 부싯돌로 점화하는 총) 개발에 참여했다. 하멜 일행은 13년을 조선에 머물다 일본으로 탈출을 감행해 조선을 서양에 적극 알렸지만 상호 교류의 문을 여는 데 실패했다.

벨테브레와 하멜이 소속된 연합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을 뿐 아니라 1500여 척의 선박을 경영하며 100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던 세계 최초의 글로벌 기업이었다. 이 회사가 일본과 통상협정을 맺을 당시부터 조선과 무역협정을 희망했고 1668년에는 아예 조선담당 무역선으로 코레아호라는 범선까지 건조했음을 감안하면 안타까움은 더 커진다. 한국이 네덜란드와 정식 수교한 것은 1961년에 이르러서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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