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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신 PD의 반상일기]착한 고수는 있어도 순한 고수는 없다

입력 | 2010-08-25 03:00:00


모든 프로 기사들은 승부를 숙명으로 안고 간다. 승리는 그들의 존재 이유다. 패배는 죽기보다 싫어한다. 승리를 향한 엄청난 압박감을 프로 기사들은 버텨내야 한다.

이세돌 9단을 양성한 권갑용 8단은 어릴 적 이 9단에 대해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체질이었다”고 회상했다. 역으로 해석하면 프로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전부를 쏟아 붓는 존재들인 것이다. 몰입이야말로 프로의 조건이자 생존 비법이다. 마지막 초읽기의 순간 고통과 함께 희열을 느끼는 이들이 프로 기사다. 몰입의 과정에서 얻는 행복은 결과에 따른 행복보다 더 깊은 원천을 지닌다. 팬들이 감동을 느끼는 지점도 한 치 물러섬 없는 치열한 승부 자세에서다.

적당한 수로 타협하려고 하면 곧바로 밀리고 만다. 그래서 독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수가 될 수 없다. 착한 고수는 있을 수 있어도 순한 고수란 없다. 프로 기사들의 승부 기질을 보면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지만 ‘독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성격상 독할 것 같은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 순둥이 소리를 듣는 기사도 승부에 임하면 독하기 그지없다.

이세돌 9단 못지않은 강펀치와 매서운 눈매의 박정환 8단(17). 조만간 최연소 9단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로 반상을 누비고 있다. 하지만 공들인 대국에서 지면 얼굴도 들지 않고 대기실에 뒀던 가방을 들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는 올봄 비씨카드배 세계대회 준결승에서 창하오 9단에게 분패했다. 1주일 뒤 후지쓰배 2회전에서 창 9단을 다시 만나 대마 사냥으로 후련한 설욕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분이 덜 풀린 표정으로 “이전에 너무 큰 판을 졌기 때문에 아직 갚을 빚이 남았다”고 했다. 한번 당한 패배의 아픔을 여러 번에 나눠서 갚겠다는 무서운 투지였다.

유연한 바둑으로 정평이 난 조한승 9단. 결정적인 대국에서 늘 아쉽게 패해 ‘(승부 기질이) 2% 부족한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어느 날 조 9단은 팻감이 많은데도 패를 때려내지 않고 다른 곳을 메워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이를 지켜본 송태곤 9단이 답답한 마음에 “왜 패를 때려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겨 있는데 때려서 뭐해”였다. 송 9단은 순간 서늘함을 느꼈다고 했다. 패싸움을 하다가 자칫 팻감을 안 쓰고 패를 때려내는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그마저 방지하겠다는 뜻. 그만큼 형세 판단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이창호 9단 뺨치게 냉철한 신중파인 그 역시 무서운 프로다.

‘독사’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는 최철한 9단은 최근 아시아경기 대표팀 전지훈련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감동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부를 쏟아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프로의 자리다.

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