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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수원 화성 한바퀴 걷기

입력 | 2010-08-27 03:00:00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왕국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태평성대를 꿈꿨다. 성곽은 성안과 성밖을 가른다. 성밖은 고층빌딩이 병풍을 치고 서 있다. 성안은 남루한 집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성밖은 시끄럽고 번잡하다. 성안은 조용하고 한가롭다. 사람들은 그 가운데를 성곽 따라 걷는다. 늦여름 햇살이 따갑다. 고추잠자리 떼가 빙빙 돈다.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이 부풀었다. 산들바람이 젖은 살갗을 스친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성곽길. 일본인 관광객들 너머 왼쪽 끝에 동북포루가 보인다. 수원화성=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쪽 대문이다.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장안’이 상징하는 바는 ‘수도’이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보1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 람은 많지 않다.<김진국·김준혁의 ‘정조의 혼 화성을 걷다’에서>》


조선 정조 임금(재위 1776∼1800)은 왜 그렇게 신도시 화성(華城) 건설에 매달렸을까. 그는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스물넷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외쳤다. 그건 피울음이었다. 가슴속 깊이 눌려 있던 뜨거운 용암이 울컥 솟구친 것이었다.

정조는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백성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나라. 젊은 인재들이 마음껏 꽃을 피우고 재정과 국방이 튼튼한 나라. 하지만 그에겐 바꿀 힘이 없었다. 권력은 노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풋내기 임금으로선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즉위 초기엔 자객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까지 있었다.

정조는 신중하고 끈질겼다. 17년 동안 묵묵히 힘을 길렀다. 그리고 재위 18년째인 1794년 1월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화성축성에 나선 것이다. 반대가 없을 리 없었다. “전하에게 깊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며 대드는 신하까지 있었다.

한양도성이 ‘구체제의 상징’이라면, 화성은 ‘새로운 조선’을 뜻했다. 한양은 기득권세력의 아지트였다. 양반 벼슬아치들의 세상이었다. 아무리 임금이 개혁을 외쳐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한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울 뿐이었다.

화성은 정조의 유토피아였다.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한 행정신도시였다. 백성이 태평가를 부르는 땅. 공허한 이론보다는 백성의 삶에 이로운 정치를 하기 위한 기반도시. 정조는 ‘백성을 위한, 백성의 신도시’를 꿈꿨다. 그러려면 성을 쌓는 과정부터 백성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했다.

정조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목수 도편수 석수 칠장이 기와장이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사비인 내탕금(86만 냥)을 털어 날품팔이 인부들에게도 빠짐없이 일당을 줬다. 일 잘하는 사람에겐 보너스도 얹어줬다. 겨울엔 이들에게 토끼털귀마개와 털모자, 솜옷까지 하사했다. 당시 귀마개와 털모자는 정3품 이상만 할 수 있었다. 이주민들에겐 시가보다 2∼3배나 더 보상비를 지불했다. 백성들은 신바람이 났다. 그렇게 연인원 70만 명을 동원해 2년 8개월(1796년 9월) 만에 행정신도시를 완공했다.

정조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머리를 빌렸다. 다산은 화성의 전체 설계를 했을뿐더러 현대판 크레인이라 할 수 있는 거중기를 발명했다. 개량된 수레 유형거도 선보였다.

공사총책임은 채제공(1720∼1799)이 맡았다. 채제공은 기초를 튼튼히 하고, 화려하게 짓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서두르지도 말라고 했다. 채제공은 화성의 서쪽대문에 현판글씨를 남겼다. ‘華西門(화서문)’이라고 쓴 편액글씨는 우직하면서도 고졸하다. 보면 볼수록 그의 사심 없는 마음이 젖어온다. 빈자리가 커 보이는 사람. 채제공은 그런 사람이었다. 채제공은 1799년, 정조에 1년 앞서 죽었다. 정조는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 신하의 제문을 직접 지었다. 채제공의 무덤은 용인에 있다.

수원화성 성곽 둘레는 4600보(5.74km)다. 원래 정약용은 3600보(4.24km) 규모로 설계했으나 축성과정에서 1000보가 늘었다. 3600보는 중국 요순시대 왕성(王城)둘레다. 화성은 한쪽이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서쪽은 반달모양이고 지대가 높다. 동쪽은 주걱턱처럼 뾰족하다. 지대는 평평하다. 언뜻 보면 사람 얼굴을 닮았다. 코에서 둥근 이마까지가 서쪽이고 그 아래 삼각형으로 각진 턱이 동쪽이다. 버드내(수원천)가 그 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코밑 선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셈이다.

①방화수류정(동북각루) 왼쪽 벽에 있는 십자문양. ② 방화수류정 마루의 정조대왕이 앉았던 자리. ③ 화서문과 밖으로 열린 옹성. ④ 연무대 뒷담장의 영롱담장 무늬. 수원 화성=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화성은 한양도성의 판박이다. 4대문이 있고 임금숙소인 행궁이 성안에 있다. 한양을 바라보는 북문은 장안문이고 남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게 팔달문(八達門)이다. 팔달은 ‘사통팔달’의 뜻을 담고 있다. 서문은 화서문(華西門), 동문은 푸른 용의 기상을 담은 창용문(蒼龍門)이다.

화성 성곽 길은 군사요새 냄새가 물씬 난다. 성벽엔 대포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이 곳곳에 나 있다. 사내아이들은 그곳에서 손가락을 내밀며 “탕! 탕∼” 총 쏘는 흉내를 낸다. 군사지휘본부인 장대(서장대, 동장대), 대포발사를 위해 지은 3층의 5개 포루(砲樓)도 군사시설이다. 포루는 지대가 높은 서쪽이나 북쪽엔 하나씩밖에 없지만 평지에 쌓은 동쪽엔 3개나 설치했다. 2층으로 지은 또 다른 5개의 포루(鋪樓)도 마찬가지다. 포루는 군사들 초소이자 대기소 역할을 했다. 그만큼 지대가 낮은 동쪽방어에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동쪽엔 봉홧불을 놓아 신호를 주고받던 봉돈(烽墩)도 있다. 벽돌로 쌓은 5개의 불항아리. 현대미술작품 같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은근한 멋이 우러난다. 군사들은 이곳에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엔 불빛을 보냈다. 용인 석성산의 봉화가 응답하고, 그를 이어받아 서해안 홍천대 봉화가 대답했다. 평상시엔 매일 밤낮으로 1개의 벽돌항아리에 불을 피웠다. 적군이 국경 근처에 다가오면 2개, 국경선에 닿으면 3개, 국경선 침범 땐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피웠다.

청나라 요동의 돈대(墩臺)를 본떠 만든 동북공심돈도 아름답다. 동북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망루다. 겉은 사각형이지만 내부는 나선형벽돌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올랐다. ‘소라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화성 성곽길은 아기자기하다. 쉬엄쉬엄 나무늘보처럼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위를 한눈에 살펴보면서도 주위풍광을 즐길 수 있는 각루(角樓)가 4곳이나 있다. 한마디로 군사 망루 겸 정자다. 싸울 땐 요새지만 평상시엔 풍류를 즐기는 곳이다.

동북각루(東北角樓)가 가장 빼어나다. 사람들은 아예 ‘꽃을 찾고 버들을 좆는 정자’라는 뜻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 수 부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른다. 마루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정조가 앉았던 자리이다. ‘凸(철)’ 모양의 볼록 튀어나온 꼭짓점이다. 저마다 앉아 본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양반다리를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는다. 일본 관광객들은 다소곳이 공손하게 앉는다.

 


방화수류정 왼쪽 벽엔 ‘십자문양’도 있다. 천주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마침 화성을 설계했던 다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가. 학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그건 조선왕실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것이며 사람들 마음속에서 우러난 수많은 무늬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문양이라면 단연 연무대 뒷담장의 영롱담장 무늬가 으뜸이다. 허리띠처럼 펼쳐진 잿빛 기와꽃무늬 담장. 영롱담장은 보면 볼수록 그 속으로 빨려든다. 마치 먹빛이슬이 아침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7년 12월 등록)이다. 수원시민들은 성밖을 따라 걷기도 하고, 성안 길로도 걷는다. 성안엔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많다. 4824개의 건축물 중 반 이상이 30년 넘었다. 문화재보호법 적용으로 4층 이상은 지을 수 없다. 성밖은 삐죽삐죽 고층건물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사람들은 갈수록 성밖으로 빠져나간다. 도심이 달동네가 돼 가는 것이다.

정조는 1804년에 14세가 되는 아들 순조에게 국왕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화성에 묵으며 상왕으로 살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에 눈을 감았다. 정약용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됐다. 조선은 정조 사후 110년 만에 무너졌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새로운 조선’이 이뤄졌을까. 개혁과 개방으로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됐을까. 신행정도시 수원화성은 ‘새 조선의 심장’이 됐을까. 생풀냄새가 코에 쎄∼하다. 고추잠자리 떼가 빙빙 맴돈다. 어르신네들이 손바닥만 한 그늘에서 다리품을 쉰다. 성 너머 푸른 하늘이 아슴아슴하다. 늦여름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제주목사가 올린 장계를 보니 전복을 따는 힘겨운 장면이 눈에 선하다. 공물을 줄이는 것이 낫지 우리 백성을 왜 고생시키겠는가? 내가 어찌 (진상품으로 올라오는) 전복 삼킬 생각이 나겠는가?’

―정조 2년(1778년)

 

행궁 정문앞 느티나무 3그루 의미는…

수원화성은 읍성이자 산성이다. 읍성은 평지에 성을 쌓지만, 산성은 주위의 지형을 활용해 쌓는다. 깎아지른 절벽부분엔 낮게 쌓고 골짜기엔 높이 쌓는 식이다. 화성도 팔달산 인근의 서장대는 지형지물을 활용해 성곽건물을 지었다. 동문지역은 평지에서부터 쌓아올렸다. 보통 읍성은 규모가 작고 산성은 크다. 읍성은 조선 초기 전국에 179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산성은 전국에 3000여 개의 흔적이 있을 정도로 많았다.

조선 한양도성의 둘레는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18.2km이다. 1396년(태조 5년) 1월 전국에서 11만8000명을 동원했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으니 한양 주민보다 인부가 더 많았던 셈이다. 전체 성곽을 180m씩 97개 공사구역으로 나눠 진행했다.

수원화성은 둘레가 5.74km에 이른다. 한양도성의 3분의 1 수준이다. 남한산성(외성 옹성 포함 11.76km, 본성 약 7km)이나 북한산성(12.7km)보다는 짧다. 하지만 해미읍성(1.8km), 낙안읍성(1.4km), 고창모양읍성(1.684km)보다는 훨씬 길다. 수원화성의 성안 넓이는 0.188km²(약 5만6000평)로 남한산성 본성 안쪽 면적 2.32km²(약 70여만 평)보다 좁다. 북한산성 6.6km²(약 200만 평)나 한양도성 7.66km²(232만 평)에도 훨씬 못 미친다.

행궁은 임금이 한양도성을 떠나 지방 나들이를 할 때 머물던 곳이다. 정조는 24년 임금 노릇을 하면서 66번이나 지방행차를 했다. 한 해 2.7회꼴로 직접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폈다. 수원은 13차례 오갔다. 과천행궁-안양행궁-사근참행궁-시흥행궁-안산행궁은 수원 가는 길에 머물던 곳들이다. 화성행궁은 576칸이다. 북한산성행궁 120칸, 남한산성행궁 98.5칸보다 규모가 크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新豊樓) 앞에는 350여 년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品(품)’자 형태로 서 있다(사진). ‘품’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을 상징한다. 행궁을 지을 때 140년 쯤 된 느티나무 세 그루를 이곳으로 옮겨 심은 듯하다. 정조는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쌀과 소금을 나누어줬다. 홀아비, 과부, 고아 등 539명과 서민 4813명에게 쌀 368석을 베풀었다.

정조의 화성행차 수행인원은 6000명에 말이 1400필에 이르렀다. 창덕궁을 떠나 한강을 건널 때는 노량진에 800척의 배를 쇠줄로 묶고 철판을 깔아 배다리(1km)를 만들었다. 그 아이디어 역시 다산의 머리에서 나왔다.

1795년(정조 19년) 8일간 화성행차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효도행차였다. 아버지 사도세자 능 참배는 기본이었다. 정조는 군복차림에 말을 타고 가면서 쉴 때마다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올렸다. 정조는 봉수당 앞마당에서 어머니 회갑잔치를 열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