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급거 중국 방문길에 오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행보에 가장 속이 탈 사람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일 것으로 보인다. 일단 카터 전 대통령은 방북 일정을 27일까지로 하루 더 연장하면서 ‘기다림’을 선택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일정은 25일 오후 순안공항에 도착한 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면담 및 만찬 참석이다.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카터 전 대통령을 공항에서 영접한 뒤 백화원 초대소에서 열린 만찬에 배석했다.
북한의 관영 언론이 전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미 행보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김 국방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접경지역을 통과해 지린(吉林) 성에 머물고 있는 김 위원장이 베이징(北京) 쪽으로 향할 경우 카터 전 대통령의 면담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게 된다. 과거 김 위원장의 방중은 통상 1주일 안팎이다. 억류 중인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를 귀환시키는 것이 공식임무지만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고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문제를 다뤄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방북한 그로서는 허탈해지는 대목이다. 곰즈 씨 석방은 사실상 그의 방북 이전에 이미 ‘성사된 거래’였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못 만나고 돌아오면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달 말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와 관련한 행정명령 발표를 앞둔 시점임에도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허가해 준 터라 김 위원장의 예상 밖 ‘파격 행보’가 떨떠름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번 김 위원장의 방중이 동북 3성 지역에 국한된다면 극적인 면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한 것도 이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용기를 이용한 방북이기 때문에 일정 조정에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카터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이미 만났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김 위원장의 방중이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이뤄졌으며 그의 행보를 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북한 지도부의 뜻에 달린 것인 만큼 방북 첫날 카터 전 대통령과 만나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을 수도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는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체류기는 결국 그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27일(현지 시간) 이후에야 속 시원히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김정일 방중
▲2010년 8월26일 동아뉴스스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