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프로는 교과서를 뛰어넘어 해법 만들어내는 사람"
은퇴를 선언한 ‘푸른 피의 사나이’, ‘양신(梁神)’ 양준혁(41·삼성 라이온즈)의 말이다. 그는 팬들이 ‘신’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최초의 선수답게 출전경기(2131), 안타(2318), 홈런(351), 타점(1389), 볼넷(1380) 등 거의 전 부문에서 한국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그는 대학과 군대까지 다녀온 뒤 24세의 나이에 데뷔해 이 성적을 기록했다. 요즘 선수들은 고교 졸업 직후인 18, 19세에 데뷔하지만 그의 기록을 깰 선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프로야구의 수준이 높아져 고졸 타자가 곧바로 주전으로 활약하기 어려워진 데다 정상급 타자가 돼도 이승엽, 김태균처럼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제2의 양준혁’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르기에 그의 꾸준하고 강렬한 기록이 더 빛을 발한다.
―만세타법 개발 등 끊임없는 타격 폼 교정 노력으로 유명합니다.
“2002년, 9년 만에 처음으로 3할 타율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30대 중반에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선수가 드물 때여서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30대 중반을 지나면 신체 상태가 20대와는 완전히 달라져요. 그런데 스타 선수일수록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몸은 달라졌는데 기분은 옛날 그대로니까요. 나이는 계속 먹는데 운동을 대하는 태도나 기술적인 접근법이 젊을 때와 똑같다면 퇴보할 수밖에 없잖아요. 생각, 훈련 방법, 타격 자세 등 모든 걸 바꾸겠다는 심정으로 몇 달을 고민하다 만세타법을 찾아냈습니다. 2002년 이후에도 만세타법을 조금씩 개량하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이미 몸에 익은 자세를 바꾸다가 원래의 폼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을 텐데요. 당시 도와주신 분이 있었어요?
“저는 항상 스스로 고민하면서 길을 찾았어요. 과거 제 타격 폼을 가지고 ‘똥폼’이라고 혹평하는 지도자도 많았습니다. 한국 지도자들은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살리기보다는 지나치게 정형화된 틀에 선수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탄탄한 기초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아마야구 선수 중 프로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는 극소수입니다. 즉 이미 그 자세로 성공했기에 프로에 온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선수만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줘야죠. 선수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도 지도자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순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 없이 지도자가 하라는 대로만 하는 선수는 2할7푼 타자밖에는 안 돼요. 그런 타자는 널렸죠. 3할 이상을 치려면 자신이 문제점을 해결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임계점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을 넘긴 어려워요.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걸 해결해야 경기력의 기복을 줄이고 슬럼프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선구안이 좋아 볼넷을 많이 얻는 선수로도 유명합니다.
“볼넷은 안타나 홈런처럼 화려한 기록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초구에 안타를 친 타자보다 9구, 10구까지 투수를 끈질기게 괴롭히다 1루까지 출루한 타자가 훨씬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훌륭한 장수는 총을 쏘지 않고도 적을 제압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홈런을 많이 치고 타점을 많이 올리면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고, 연봉 협상 때도 유리하죠. 하지만 선구안에 신경 쓰지 않고 안타만 치려고 하면 나쁜 공에 배트가 나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스타 선수는 투수들의 견제를 많이 받습니다. 투수는 좋은 공을 안 주고 승부를 피하려 하는데 안타 욕심에 나쁜 볼을 건드리면 안타를 치기 힘듭니다. 본인 성적도 나빠지고 팀 전체에도 해를 끼치죠. 그럴 바에는 볼넷으로 걸어 나간 후 다음 선수들에게 타점 올릴 기회를 주는 게 자신과 팀 모두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축구로 말하면 스트라이커가 아닌 미드필더 역할이 어울리는 선수입니다. 미드필더가 볼 배급을 해주듯 일단은 스트라이커에게 골을 넣을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제가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확실한 기회가 생기면 제가 해결하는 거죠.”
“슬럼프에도 작은 슬럼프가 있고 큰 슬럼프가 있습니다. 작은 슬럼프 때는 달리기를 평소보다 많이 하거나 훈련 시간을 늘리는 식의 변화를 주죠. 그럼 곧 해결됩니다. 그 정도로 극복할 수 없는 큰 슬럼프는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은 채 바닥을 치도록 내버려둡니다. 몸이 무거운 걸 느끼면서도 운동으로 이를 풀지 않고 몸을 더 무겁게 만드는 거죠. 바닥을 쳐야 올라갈 수 있거든요. 물론 바닥을 치고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힘들죠.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느껴지고요. 그럴 때일수록 제 자신을 내려놓고 팀에 완전히 동화돼야 합니다. 벤치에서 평소보다 파이팅을 더 크게 한다거나 후배들을 돌봐주는 식이죠. 제 성적이 잘 안 나온다고 제가 힘들어하면 후배들의 플레이에도 지장을 줘요.”
―평범한 내야 땅볼이나 짧은 안타를 치고도 1루까지 열심히 뛰는 타자로 유명합니다.
“1994년 미국에서 마이너리그의 최하위 단계인 루키 리그를 관전했습니다. 거기 선수들은 경기 도중 조그마한 실수만 하면 바로 짐을 쌉니다. 가라는 말도 없이 지도자가 보드에 이름 하나를 적으면 끝이에요. 그래서인지 아웃이 뻔한 내야 땅볼을 치고 미친 듯 달리는 건 예사고, 볼넷을 얻고도 1루까지 질주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 선수들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명색이 프로인 나는 어떤가.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더군요.
야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땅볼에 상대팀 선수가 실책을 할 수도 있는데 왜 설렁설렁 걸어가면서 미리 포기합니까. 저는 지금껏 야구하면서 단 한 번도 1루에 그냥 간 적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아웃을 당하더라도 불리한 공은 계속 커트하면서 투수가 공을 하나라도 더 던지게 만들고, 쉽게 죽지 않아야 합니다. 단타를 쳐도 2루까지 가려고 노력하고, 2루타를 치면 3루까지 도전하는 게 진짜 야구예요. 최초의 2000안타 타자도 좋고, 홈런왕도 좋지만 훗날 팬들이 저를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선수라면 항상 만족하지 않고 더 욕심을 내야 하는데, 요즘 선수들은 자기만족에 잘 빠집니다. 우리 팀 후배들만 해도 같이 훈련을 하면서 저에게 뭘 물어보는 선수가 별로 없어요. 저는 이승엽 선수가 한국에 있을 때 한참 후배지만 항상 승엽이에게 타격 자세나 방법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한 번도 창피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더 잘하는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빼먹으려고 덤비는 게 진정한 프로니까요. 더 높이 올라가려면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대가와 희생도 치러야 합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신영성 인턴연구원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18년간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한 양준혁 선수는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듯 타격 폼을 바꾸면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몸부림쳤다”고 말했다. 사진=김철오 cokim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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