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품에서 미국 견제하려 再방중
2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에 이어 26일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고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는 서울을 찾았다. 삼각파도가 몰려왔다고 해야 할까. 개별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행보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기 때문에 관련국 정부와 전문가들은 연결고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국민의 관심도 뜨겁다. 우리 정부는 북한을 둘러싼 정세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북-미 북-중 한중 접촉을 관리하는 주역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영문도 모른 채 파도에 휩쓸리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인가.
올해 86세인 카터는 16년 전 활약을 떠올리며 북한으로 들어갔다. 1994년 6월 15일 판문점을 넘어 방북한 그는 김일성과 ‘미국이 대북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은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두 사람의 합의는 그해 10월 21일 제네바 기본합의로 결실을 봤다. 그들은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도 텄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지 않았더라면 카터의 중재외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카터의 공적에는 북-미 긴장완화와 남북한 화해 노력이 포함돼 있다. 그런 기억이 있는 카터가 미국인 억류자만 데리고 돌아온 것은 빈손이나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카터를 외면함으로써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카터의 굴욕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뒷면은 중국에 대한 김정일의 집요한 구애(求愛)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 북-중 혈맹의 뿌리에 대를 이어 매달리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다. 중국의 품에 안겨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 국면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美, 김정일에 당하지 않을 안목 있나
요즘 북한에서는 경축행사가 연일 벌어진다.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이 50년 전 김일성을 따라 한 탱크사단을 방문했다는 8월 25일을 뜬금없이 ‘선군혁명영도 시작일’로 지정해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중국과의 혈맹을 강화하면서 3대 세습을 위해 김일성 가계(家系) 우상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