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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史·哲의 향기]정치적 평등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

입력 | 2010-08-28 03:00:00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156쪽·1만 원/후마니타스




“이 짧은 책에서 나는 ‘정치적 평등’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21세기의 세계는 정치적 평등의 진작에 얼마나 호의적일 수 있을까?”

미국 정치철학자 로버트 달이 2006년 발표한 마지막 저서다. 출간 당시 91세였던 저자는 이후 집필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를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온 노학자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치적 평등이 과연 실현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 대상으로 미국사회를 상정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 적용하더라도 어색함이 없다.

저자는 우선 “모든 인간은 평등한 본질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본질적 평등’을 전제한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적 이해의 획득, 의제에 대한 최종적 통제 등은 이상적 민주주의, 즉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정치제도의 조건이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이 이성적으로 합당한 목표라는 점 그 자체가 인간 행동을 추동할 수 있을까. 저자는 순수이성만을 인간 행동의 유일한 추동력으로 파악한 칸트를 비판하며 “이성이란 열정의 노예”라고 말했던 흄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지난 수백 년간 사람들이 정치적 평등을 위해 투쟁하도록 만든 힘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불평등 혐오’를 들 수 있다.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감정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데 대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 외에도 감정이입과 공감, 그리고 두려움이나 개인적 야심도 복합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백 년간 지속적으로 증진돼 온 정치적 평등은, 다음 세기에도 그 성취를 계속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정치적 평등이 축소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정치적 자원이나 지식, 기술의 불평등한 분배와 시장경제 아래에서의 불평등 심화 등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테러리즘과의 전쟁, 이로 인한 대통령의 권한 확대 역시 새로운 변수다. 더 큰 문제는 소비주의 문화다. 사람들은 이제 시기심이나 질투심, 감정이입과 같은 감정적 에너지를 소비에 투입한다. 정치적 평등은 더는 사람들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적 평등이 진작될 것이라는 희망 역시 버리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시장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자본주의가 행복이나 복지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전환이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면 소비주의 대신 정치적 평등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우위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한 채 어느 쪽으로도 명확히 결론짓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 그 몫을 맡길 뿐이다. 이 책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아직은 아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 소비주의 문화에 내재한 공허함을 자각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가져오는 보상과 도전 의식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미국을 저 멀리 잘 잡히지 않는 목표에 훨씬 더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