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딜레마’가 정권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려던 여권의 발목을 잡았다. 27일 예정된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처리가 일단 연기되면서 9월 정기국회 전에 새로운 당정청 진용을 출범시키려던 여권의 구상도 흔들리게 됐다. 김 후보자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는 물론이고 여권 내부의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 쏟아진 김태호 불가론
27일 오전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열린 국회 본청 246호. 김무성 원내대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속히 안정적인 내각을 꾸려 국정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며 소속 의원들에게 김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처리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총리보고서 채택말라” 의사봉 빼앗는 박영선 의원 27일 국회 제3회의장에서 열린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위 회의에서 한나라당 소속 이경재 위원장이 김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심사경과 보고서를 상정하려고 하자 민주당 박영선의원이 이를 급히 막고 있다. 이 위원장은 심사경과 보고서를 상정한다는 의미에서 의사봉을 한 차례 내리쳤으나 박 의원이 의사봉과 손목을 붙잡아 더 치지는 못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특히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보다 친이계 의원들이 김태호 불가론을 집중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당 안팎에선 이날 의원들의 집단발언은 8·8개각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지한 수도권과 초선 의원들의 위기감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김 원내대표는 “여러분의 생각을 잘 알겠다. 시간을 두고 논의하자”며 무마에 나섰다. 여야 원내대표는 협상을 통해 이날 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처리하려던 본회의를 9월 1일로 연기하기로 했다.
○ 여권 지도부의 깊어지는 고민
당 지도부는 주말을 거쳐 30, 31일 의원연찬회에서 의원들을 상대로 다시 설득하기로 했다. 김 후보자 대신 1, 2명의 장관 후보자를 포기하는 이른바 ‘빅딜’ 방안에 대해서도 일단 총리 문제가 먼저 해결된 후 다시 검토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다음 달 1일 한나라당이 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처리를 시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는 여전히 “절차에 따라 표결로 인준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인준표결에서 부결된 장상 장대환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례를 모두 조사한 결과 그들의 낙마 사유보다 야당이 문제 삼는 김 후보자의 문제점이 훨씬 약하다”고 말했다. 야당이 무리한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 일각에선 여당 내부 기류와 여론의 추이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기류도 있다. 한 청와대 참모는 “외부 여론을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이번 주 들어 두 번이나 반복된 이 대통령의 ‘높은 기준’ 언급을 미묘한 기류 변화의 신호탄으로 보기도 한다. 이 대통령은 23일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기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했고 27일 전체 참모를 상대로 “나의 일상생활이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걸맞은 것인지 되돌아보자. 나부터 그러겠다”고 했다.
○ 의사봉 둘러싼 신경전도
이날 김 후보자의 청문보고서 채택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회 총리 인사청문특위에선 시종 여야 간에 신경전이 펼쳐졌다.
야당 특위 위원들은 김 후보자가 제출하기로 약속했던 ‘박연차 게이트’ 검찰 내사기록이 제출되지 않았다며 청문보고서 채택 연기를 주장했다. 김 후보자는 청문회 때 검찰에 내사기록 공개를 당사자 자격으로 요청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기록 열람, 복사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오전 11시 50분경 한나라당 소속 이경재 위원장이 청문보고서 기습 상정을 시도하며 의사봉을 한 차례 두드렸지만 두 번째 두드리려는 순간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약속 위반”이라며 이 위원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당의 강력한 항의에 잠시 정회가 선언되기도 했지만 본회의 처리 시기가 다음 달 1일로 연기되면서 청문보고서 채택 건도 유보됐다.
한편 야당은 김 후보자 인준에 대해 ‘절대 불가’ 방침을 재확인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비리투성이인 후보자들을 그냥 봐준다면 국민이 야당을 어떻게 보겠나”라고 말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도 의총에서 “청문회에서의 거짓말은 결정적 결격 사유”라며 김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