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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흘러간 시간은 따뜻하다

입력 | 2010-08-31 03:00:00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연기★★★★ 연출★★★☆음악★★★☆ 무대★★★




유대계 귀부인 데이지(손숙)와 흑인 운전사 호크(신구)가 20여 년의 세월을 통해 인간미 넘치는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그린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누가 연극을 젊은이들의 예술이라고 했던가. 연극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줄 아는 이들의 예술이다. 속도감을 즐기는 젊은이가 시간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세월의 호흡을 터득한 노인은 시간과 놀 줄 아는 사람이다. 연극은 그렇게 시간의 얼개를 감고 풀 줄 아는 노인의 예술이다. 갈수록 젊음을 추구하는 시대에 “무대 위에 설수록 하루빨리 늙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는 어느 여배우의 말이 참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그런 연극의 참맛을 일깨워준다. 제시카 탠디와 모건 프리먼 주연의 영화로 각인된 이 작품의 원작이 연극이란 발견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첫 희곡인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극작가 앨프리드 유리의 작품 발표 당시 나이가 쉰한 살이란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요소다.

1시간 40분 분량의 연극은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를 무대로 1940년대 말∼1970년대 초를 관통한다. 영화와 달리 연극에는 딱 3명의 인물만 등장한다. 유대인 가문의 귀부인 데이지 여사(손숙)와 그의 사업가 아들 불리(장기용), 그리고 불리가 고용한 데이지 여사의 흑인 운전사 호크(신구)다.

첫 장면에서 데이지 여사의 나이는 이미 일흔다섯이다. 호크도 그보단 젊지만 요즘 같으면 진작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끝’이란 자막이 나올 시점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교사 출신의 깐깐한 할멈과 능구렁이 같은 흑인 할아범의 밀고 당기는 기(氣) 싸움이 기본 얼개다. 저마다 험한 시대 험한 세상을 헤쳐 나온 만만치 않은 내공이 충돌한다. 데이지는 유대인을 속물 취급하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송곳 같은 가시로 자신을 감싼 고슴도치를 닮았다. 반면 호크는 흑인은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 세상의 편견을 단단한 직업윤리로 묵묵히 받아내는 거북이를 닮았다.

고슴도치와 거북이의 공통점은 버티기의 대가라는 점이다. 사업가인 불리에겐 시간은 금고 속에 감춰둬야 할 귀금속 같은 것이다. 반면 데이지와 호크에게 시간은 목적지로 가려면 꼭 써야 하는 연료 같은 것이다. 데이지가 운전대를 잡은 호크에게 시속 30km의 주행속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장면이나, 호크가 ‘운전사가 필요 없다는 데이지를 설득하는 데 육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장면의 시간관념은 그렇게 공명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많은 세월을 지불하며 서로에 대한 인식지평을 확장해간다. 연극은 그들 머리 위에 켜켜이 쌓여가는 서리를 통해 그 세월의 무게를 담아낸다. 배우들은 그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움직임이 느려지고 혀끝이 둔해지고 눈은 초점을 잃어간다. 급기야 데이지는 치매에 걸리고 호크는 더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게 된다.

누가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있으랴 싶은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든다. 미국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유대인 데이지와 최하층부에 위치한 흑인 호크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순간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데이지 여사 역의 손숙 씨는 오랜만에 적역을 만나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연기를 펼치다 세월의 흐름 속에 서서히 침잠해가는 명품 연기를 펼친다. 호크 역의 신구 씨는 능청맞으면서도 차진 연기로 거구의 모건 프리먼과 또 다른 정감 넘치는 호크를 창조해낸다. 불리 역의 장기용 씨도 안정된 발성과 중후한 연기로 노배우들의 지렛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바로 ‘시간’이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피아노와 기타로 구성한 라이브 음악과 긴 호흡의 암전을 통해 그 시간의 흐름을 손에 잡힐 듯 형상화해냈다. 하지만 미국의 시대적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데이지 여사의 자동차가 밋밋한 차대(車臺)로만 등장하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1987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 연극은 올해 10월 제임스 얼 존스(79)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73) 주연으로 브로드웨이에 입성한다. 유대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비판해 온 레드그레이브의 유대인 연기로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는 이 작품의 진가를 미리 맛볼 수 있는 기회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5만 원. 9월 1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