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도 어김없이 3분 만에 닭볶음탕을 해치운 윤 양. 그는 절친(절친한 친구)인 박모 양(17)의 닭볶음탕을 빼앗아 먹기로 결심했다. 윤 양은 눈웃음을 지으며 박 양에게 다가갔다.
“혹시 닭볶음탕 남았으면 나 한 조각만….”
요즘 ‘○○녀’ ‘○○남’이 대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녀’, ‘○○남’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가 된다. 최근엔 태풍 곤파스가 가져온 강풍 탓에 길을 걷다 넘어진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 TV 뉴스에 나간 뒤 ‘태풍녀’ 혹은 ‘곤파스녀’란 신조어가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 케이블TV 프로그램은 ‘순정녀(순위 정하는 여자)’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열풍은 고등학교에까지 불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바탕으로 이들은 전교에 이름을 떨친다.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MP3 플레이어에 노래를 내려받을 줄도 모르는 남학생에겐 ‘원시남’이란 별명이, 학교 운동회에서 응원단장을 맡아 멋진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공부 못하는 애’라는 오명을 말끔히 씻은 남학생에겐 ‘응원남’ ‘박수남’이란 별명이, 하루 종일 학교수업은 안 듣고 인터넷 강의만 뚫어져라 보는 여학생에겐 ‘인강녀’란 별명이 붙여지기도 한다. 이들이 그런 별명을 갖는 데는 특이한 행동이나 특정 사건이 원인이 된다.
고2 최모 양(18·경기 성남시)은 학교에서 ‘차도녀’로 통한다. ‘차갑고 도도한 여자’란 뜻의 별명처럼 최 양은 평소 말수가 적고 웬만한 일엔 웃지 않는다. 쉬는 시간 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이돌 스타 얘기로 시끌벅적할 때도 교실 한쪽 구석에서 홀로 말 없이 패션잡지에 몰두한다. 하지만 차도녀란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이 때문만이 아니다.
최 양에겐 교제한 지 1년 조금 넘은 같은 학교 동갑내기 강모 군(18)이 있다. 다혈질인 최 양과 달리 강 군은 다정다감하기로 유명하다.
“하루는 남자친구의 성격 때문에 크게 싸운 적이 있어요. 지나가던 여자 후배에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갑자기 질투가 나는 거예요. 욱하는 성격에 ‘혹시 여자후배와 몰래 만나고 있는 게 아니냐’며 화를 냈죠. 남자친구도 당황스러웠는지 ‘왜 그런 의심을 하느냐’면서 되레 화를 내더라고요.”(최 양)
“어렸을 때 해외에서 2년 간 살다온 탓에 반 친구들보다 제가 한 살이 많아요. 남자친구가 꽃을 들고 왔을 땐 내심 좋았지만 동생들 앞에서 꽃을 받기가 왠지 민망하더라고요. ‘닭살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날 최 양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그를 ‘차도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강 군에게도 ‘여자친구에게 굽신거린다’는 뜻으로 ‘굽신남’이란 별명을 선물했다.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 때문에 ‘○○녀’의 별명을 얻게 된, 다소 억울한 경우도 있다.
고2 박모 양(17·서울 광진구)은 학교에서 ‘망신녀’로 불린다.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성격 짱’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던 박 양이 하루아침에 이런 망신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건 고2 1학기 때. 개학 첫날 수학 수준별 수업에서 한 남학생을 만나고 나서다. 그는 박 양의 이상형인 미키마우스를 닮은 남자였던 것이다.
문자를 주고받은 지 4일째, 박 양은 남학생과 학교 앞 커피전문점에서 만나 그동안 숨겨왔던 사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박 양의 절친 4명도 “응원을 해준다”며 약속장소에 함께 가기로 했다. 결과는?
“남학생이 제 고백을 듣자마자 휙 돌아서서 반대편으로 걸어가 버리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억울한 마음에 따지려고 쫓아가려는데 그만 제 발에 걸려 혼자 넘어졌어요. 이 장면을 본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저한테 망신녀란 별명을 지어줬죠.”
이런 소문은 학생들뿐 아니라 교무실에까지 퍼졌고, 박 양은 ‘스타 아닌 스타’가 됐다. 그는 “제가 아무리 사소한 실수를 해도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역시 망신녀’라고 놀릴 땐 억울하다”면서 “하지만 이런 나의 허술한 모습 덕분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친근하게 대해 주는 건 유일한 이점”이라고 말했다.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