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배경 영화 촬영지 순례
런던의 명소들은 많은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며 다양한 매력을 뽐낸다. 사진은 웨스트런던 노팅힐을 배경으로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와 평범한 이혼남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 ‘노팅힐’의 주인공 줄리아 로버츠, 휴 그랜트와 타워 브리지. 사진 제공 영국 관광청
10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 10년 전 배낭여행객 시절 옷가지와 컵라면, 즉석밥 등으로 가득 차 있던 배낭은 이제 노트북 가방과 슈트케이스로 바뀌었지만 공항 착륙을 앞둔 이방인의 살짝 들뜬 마음은 예전 그대로다. 비행기에서 MP3 플레이어로 내내 반복해 들은 펫샵보이즈(1981년 결성된 영국 출신 2인조 일렉트로닉 팝 그룹)의 히트곡 ‘런던’의 후렴구 ‘We are in London’은 히스로 공항에 내린 뒤에도 입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10년 전 런던 여행은 ‘엽서사진’ 찍기의 연속이었다. 런던의 명소를 가본 것을 기어이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트래펄가 광장에서 내셔널갤러리로, 다시 버킹엄 궁전에서 타워브리지와 빅벤, 대영박물관으로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이동하며 이들 명소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번 런던 체류는 런던에 허기라도 진 사람 같았던 그때처럼 허겁지겁하며 보내기 싫었다. 숙소에서 한참이나 런던 지도를 들여다본 끝에 결정한 이번 런던 여행의 테마는 ‘런던이 배경인 영화 촬영지 순례’. 남들이 정한 코스를 따를 필요도, 다녀왔다고 으쓱댈 필요도 없는 나만의 맞춤 여행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 런던 토박이처럼 하이드파크를
음악을 들으며 조깅을 하는 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이, 유모차에 태운 백인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동양인 보모들의 여유 있는 표정에서 공원 밖의 번잡함도 잠시 남의 나라 얘기가 된다. 내가 이방인인 줄 모르고 공원 지리를 물어오는 배낭 여행객들 덕분에 마치 런던 토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하이드파크 남쪽 끝에 있는 앨버트 공(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의 동상을 지나쳐 서쪽으로 한참을 걸어 공원 서쪽 끝 켄싱턴 궁에 도달했다. 켄싱턴 궁은 지금은 고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거처였다.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 추모객들이 켄싱턴 궁 정문에 붙여 놓은 다이애나 비의 사진과 꽃다발 앞에서 짧은 묵념을 하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하이드파크를 빠져나와 외국 대사관이 즐비한 거리를 빠져나오면 금세 지하철 ‘노팅힐 게이트’ 역에 닿는다. 이 역에서 뻗어나가는 포토벨로 거리 양쪽에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노점, 음반과 서적을 교환하는 상점과 복고풍 의상점 등 특색 있는 점포가 가득한 ‘포토벨로 시장’이 들어서 있다. 영화 속에서 한때 애나를 떠나보낸 윌리엄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거니는 동안 사계절이 연속으로 변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 노팅힐 서점에서 스페인을 꿈꾸다
포토벨로 거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켄싱턴 공원로에는 윌리엄의 선한 표정을 믿고 애나가 방금이라도 따라 들어갔을 것 같은 파란 대문의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영화의 주제곡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를 흥얼거리며 한참을 걷다보면 영화 속에서 윌리엄이 사장으로 있었던 ‘트레블 북 숍’이 거짓말처럼 눈 앞에 나타났다. “(만인이 좋아하는 톱스타이긴 하지만) 나 또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선 사랑을 갈구하는 평범한 여자”라고 애나가 윌리엄에게 고백했던 그 서점은 그렇게 10년 넘게 노팅힐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용기를 내 서점으로 들어가 봤다. 책 도둑을 방지하려고 설치해 둔 폐쇄회로(CC)TV 모니터 위치까지 영화와 판박이다. 윌리엄과 그의 소심한 동료가 서 있던 계산대는 이제 상체에 달라붙는 셔츠가 제법 잘 어울리는 미남 사장과 자그마한 체구의 금발 여직원이 지키고 있다. 누가 노팅힐의 촬영지가 아니랄까봐 진열대 맨 앞에는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으로 연기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의 원작소설을 진열 해 놨다.
런던=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