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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 끝나지 않은 망령

입력 | 2010-09-09 21:42:18


액정표시장시장치 제조회사인 디에스LCD의 오인환 사장은 9일 본사 사옥 1층 로비에 전시하고 있던 '2억불 수출의 탑'을 서울 여의도에 있는 키코 피해대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사무실로 보냈다.

수출의 탑은 수출 기업이라는 것을 정부에서 인증해 준 상징물이어서 자랑스럽게 전시를 하고 있었지만 '키코 사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공대위를 통해 정부에 반납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키코로 15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공대위 사무실에는 환 헤지 상품인 키코(KIKO)로 피해를 본 24개 기업들이 보낸 수출의 탑 39개가 쌓여 있다. 수출의 탑 액수를 모두 합치면 7억7000만 달러에 이른다. 공대위는 10일 금융감독원을 방문해 수출의 탑을 모두 반납할 계획이다.

공대위 관계자는 "키코를 판매한 은행을 제대로 감시하지도 않고 징계하지 않고 있는 금융감독원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말했다.

● 끝나지 않은 '키코 망령'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경제 위기의 여파로 환율이 치솟으면서 중소기업들을 연쇄 도산의 공포에 떨게 했던 키코는 지난해부터 환율이 점차 하락하면서 일반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키코에 가입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업들 대부분은 자금난으로 예전과 같은 성장세가 꺾였다. 키코로 손실을 입은 일부 중소기업들은 부도를 내거나 매각되는 등 키코 피해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컬럼비아스포츠로 알려진 아웃도어 의류를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으로 생산해 수출했던 BMC어패럴의 임종목 사장은 7대를 이어 살던 종가집이 법원 경매에 넘어갔다. 동갑내기인 부인 이순덕 씨와 함께 알뜰하게 회사를 운영해 2007년까지는 9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2007년 12월 외환은행 직원의 거래로 키코에 가입하면서 불운이 시작됐다. 환율이 뛰면서 은행 빚은 10억 원을 넘겼고 체납된 세금은 1억2000만 원이 넘었다. 이 회사는 현재 폐업한 상태다.

유압중장비 생산업체인 코막중공업은 수출이 매출의 95%를 차지한 유망 중소기업이었다. 해외 60여 개 국에 수출해 연 매출액이 200억 원에 이르렀다. 이 회사 역시 2007년 가입한 키코에 발목이 잡혔다. 환율이 오르면서 키코로 손실을 본 액수만 100억 원에 이르렀고 연체 이자까지 합하면 180억 원을 날렸다. 공장을 팔아서 은행에 갚아야 될 돈은 모두 갚았지만 운용 자금이 없어 지난달 18일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100여명에 이르던 직원은 15명으로 줄었다.

250개 키코 피해 중소기업들이 만든 '키코 피해대책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달까지 키코 피해로 폐업하거나 매각된 기업만 최소 6개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는 8곳에 이른다.

이들을 포함해 30여 개 수출기업이 극심한 자금난으로 사실상 도산상태에 놓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기업 손실액만 2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공대위는 추산하고 있다. 도산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들은 대부분이 해외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은 우량 기업이다. 키코가 무담보 신용 상품 성격이 강해 은행들이 우량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판매를 했기 때문이다.

● 법원 판결에 희망

요즘 키코 피해기업들의 최대 관심은 법원 판결에 쏠려 있다. 현재 140여개 회사가 각자 거래 은행들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등의 민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업체들은 법원이 키코 계약의 부당성을 인정하면 그 동안 상환한 손실액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승소 가능성은 미지수다. 현재 법원에서 치열한 법리다툼이 진행 중인데 김앤장, 광장 등 국내 주요 로펌들이 키코 소송에서 은행 측 대리인을 맡고 있어 중소기업 입장에선 힘겨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대위 부위원장인 조붕구 코막중공업㈜ 대표는 "키고 피해 기업들은 손실액 상환을 미룬 채 법원 판결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며 "하지만 기업들이 패소할 경우 키코 손실액이 모두 채무로 확정되기 때문에 우량 수출기업들의 줄 도산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