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과 다른 도덕 수준 보여 달라”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언급했을 때만 해도 신문들은 통일세를 큰 제목으로 달고 공정한 사회는 작은 제목으로 취급했다. 공정한 사회를 사회적 화두로 키운 것은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였다. 소장수 아들이라는 서민적 이미지는 박연차 씨와의 관계, 인터컨티넨탈호텔의 하루 93만 원짜리 방 투숙, 공무원 가사 도우미, 관용차를 타고 강의하러 가는 사모님, 연이어 들통 나는 거짓말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40대 총리 후보자에 대해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어린 비둘기가 재를 못 넘는다)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그를 낙마시킨 건 중앙정치 경험 부족보다는 의원보좌관을 하며 배운 겉 다르고 속 다른 여의도 정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사청문회가 서민 정서를 자극하는 사생활 검증에만 치중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미국에서 고위 공직 후보의 사생활 검증은 연방수사국(FBI)과 언론이 주로 맡고 상원 인사청문회는 정책 능력 검증 위주로 진행된다. 공정한 사회는 좋지만 공정 의식의 과잉도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모든 사안에 공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다 보면 대학입시나 공무원 선발에서 객관식 점수로 줄을 세워놓고 뒤부터 자르는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 점수 몇 점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측정할 수밖에 없는 인성 창의력 잠재력 전문성 같은 요소이다.
하버드대 철학과 존 롤스 교수는 ‘정의론’에서 시기심(envy)과 의분(義憤·indignation)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촉구했다. 불공정성에 대한 의분은 사회의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시기심은 승자를 미워하는 악덕이다. 프로이트는 정의감이 시기심이나 질투로부터 생겨난다고 보았지만, 롤스 교수는 진정한 정의감은 시기심에 입각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고, 자신이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정의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고 갈파했다.
시기심 영합 포퓰리즘 경계해야
과거 우파가 시장에서 개인의 선택에 따른 자기 책임을 강조했다면 좌파는 시장의 경쟁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패자들에 대한 배려를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MB의 중도 실용주의나 공정사회론은 우파의 좌파 수렴(收斂) 현상이다. 공정사회론은 튼튼하고 지속가능한 시장경제를 만들자면 효율성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고, 좌파 논리까지도 수용해 패자를 배려하고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익부 빈익빈의 골을 좁혀야 한다는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역으로 좌파의 우파 수렴현상은 큰 정부와 복지병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했던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노동당)의 ‘제3의 길’이 보여줬다.
MB 정부가 후반기 국정 핵심 키워드로 설정한 공정한 사회가 진정성을 인정받고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대통령과 권력자들이 설사 손해를 보고 피를 흘리더라도 공정성의 원칙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함께 불공정에 대해 최근 휘몰아치는 의분의 물꼬를 잘 터주면서도 시기심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땀 흘린 대가와 창의력에 대한 인센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역동성을 잃어버린 죽은 사회가 된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