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시간 나 혼자 이해하고 홀로 키득키득!”
“시차스 모이으 드룩 피셰트 피사치(Сейчас мой друг пишет письмо).”
민 군이 ‘지금 내 친구는 편지를 쓴다’란 문장을 읽는 순간, 교실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이모 군(16)이 뜬금없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 이 군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나머지 학생 35명은 어리둥절했다.
“피사치(письмо)란 단어는 어디에 악센트를 주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져요. 단어의 앞에 악센트를 주면 ‘쓰다’란 의미가 되지만, 단어의 뒤를 강하게 발음하면 ‘소변을 보다’란 뜻이 되죠. (문법상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 내 친구는 편지에 소변을 본다’라고 읽은 셈이에요. 러시아에서 살다온 저만 이런 미묘한 억양 차이를 알아들은 거죠.”
최근 해외주재원인 부모를 두었거나 해외어학연수를 하는 통에 외국에 장기간 살다 귀국한 고교생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나는 웃지 못할 장면이다. 이렇게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제2외국어에 능통한 고교생들이 증가하면서 일선 교실의 외국어수업 현장에선 이른바 ‘유머 디바이드(humor divide)’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머 디바이드. 즉 외국어로 된 농담 등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웃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학생들은 그게 유머인지조차 모르는 상반된 모습이 동시에 연출되는 일종의 ‘유머 격차현상’을 일컫는 신조어다.
원어민 교사의 수업시간에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외국어에 능통한 학생들은 교사가 던지는 농담을 알아듣고 박장대소하는 반면, 나머지는 ‘멍’한 표정을 짓는 것. 이 군의 사례처럼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혼자만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한 여고 2학년 원모 양(17)은 초등 5학년부터 중2 때까지 영국 런던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원 양은 학생들 사이에서 ‘본드 걸’ 혹은 ‘런던녀’로 통한다. 그에게 이런 별명이 붙여진 이유는 단순히 런던에 다녀온 경험 때문만이 아니다.
학기 초 원 양과 반 친구들은 이 영국인 교사의 수업시간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원어민 교사는 미소는커녕 찡그린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다. 게다가 한껏 화가 난 어투로 무언가를 중얼중얼하며 영어로 빠르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난데없는 험한 분위기에 학생들이 일제히 당황하던 순간이었다. 교실 한 구석에 앉아있던 원 양이 갑자기 키득키득하며 웃기 시작했다. 도대체 원어민 교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선생님이 아마도 축구광(狂)이었나 봐요. 전날 경기에 진 영국 축구국가대표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더라고요. 심지어 그날 경기를 중계했던 아나운서에게까지 ‘the announcer's lame excuses are nauseating and his intonation and face too(아나운서의 목소리뿐 아니라 얼굴까지 역겨울 정도였다)’라고 했죠. 평소와 달리 축구경기 하나를 두고 그토록 흥분하는 모습이 우습기도하고 귀엽게도 보여 그만 웃음이 났어요. 다른 애들은 영국식 발음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 말까지 빨라 잘 알아듣지 못했나 봐요. 선생님이 ‘nauseating’(몹시 싫은·역겨운)처럼 평소 접하기 힘든 단어를 쓰기도 했고요.”
이후 원 양은 친구들 사이에서 ‘원어민 교사와의 통역’을 전담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원 양은 “이날 사건이 원어민 선생님과 더욱 친해질 수 있는 ‘단독찬스’가 되었던 셈”이라며 “이후 ‘나도 원어민 선생님의 통역을 하겠다’며 영어공부에 더욱 매진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고 전했다.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