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 단순함의 역설잡다한 기능빼고 책읽기만 강조… 태블릿PC 돌풍에도 ‘킨들’ 등 강세
전자잉크 방식의 전자책 단말기는 조명이나 햇빛이 바로 비치는 밝은 곳에서도 반사가 적어 책을 읽기가 편리하다. 사진 제공 북큐브네트웍스
○ 버리는 게 남는 것
하지만 그 점이 역설적인 매력이었다. 킨들3는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잡다한 기능은 다 빼고 오직 책읽기 기능만 강조한 덕분에 크게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마존은 판매대수를 공개하지는 않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지금까지 킨들이 350만 대 이상 판매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존은 킨들3에 대해 “지금까지 판매한 킨들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많이 팔렸다”고 밝혔다. 기능이 줄어들면서 값이 내려간 것도 판매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경쟁 제품이라 할 애플의 아이패드는 가장 싼 모델이 499달러(약 58만 원)인 반면 킨들3는 139달러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북큐브네트웍스는 지난달 15일부터 보름 동안 ‘B-815’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예약 판매로 1만 대 가까이 팔았다. 국내 전자책 업계가 추정하는 전자책 단말기 누적 보급대수가 5만 대 정도인 걸 감안하면 보름 만에 이 단말기 하나가 단숨에 시장의 20%를 차지한 셈이다. 별다른 마케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전자책 업계에선 북큐브네트웍스의 성공이 큰 화제였다.
흑백 화면에 동영상도 볼 수 없는 전자잉크를 사용한 전자책 단말기는 컬러 화면에 강력한 성능의 태블릿PC때문에 시장에서 사라질 거라는 비관적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전자책 단말기가 ‘틈새’를 찾는 데 성공했다. 책을 읽는 본연의 기능에 집중하면서부터다. 사진은 인터파크의 전자책 단말기 ‘비스킷’. 사진 제공 인터파크
이렇게 기능을 줄이니 값도 내려갔다. 대부분의 국내 전자책 단말기는 20만 원대에 팔리지만 이 제품의 가격은 14만9000원이었다. 북큐브네트웍스 기획홍보팀 이상수 팀장은 “‘책읽기’ 기능 외에는 다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제품을 단순하게 기획했더니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전자책 동호회 등에서 이 단말기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는데 지금은 재고가 부족해 판매를 못하고 추가 예약만 받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컬러 액정표시장치(LCD)를 사용한 태블릿PC보다 전자잉크를 사용한 전자책 단말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업상 시판하는 전자책 단말기를 대부분 사용해 봤다는 교보문고 전략마케팅팀 류영호 과장은 “갤럭시탭이나 아이패드도 써봤지만 책을 읽는 데는 킨들이 가장 좋았다”며 “아이패드를 쓰면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가 아닌 게임, 인터넷 검색 등에 보내지만 킨들은 오직 책을 읽는 데만 쓰게 된다”고 말했다. 학습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작가 이원복 덕성여대 교수도 “최근 ‘누트’라는 전자책 단말기로 다양한 책을 읽게 됐는데 출장길에 비행기에서 책을 읽기에 최고”라고 말했다.
○ 콘텐츠를 얻는 다양한 길
전자책 단말기가 아무리 좋아도 읽을 콘텐츠가 부족하면 시장이 생길 리 없다. 국내 전자책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도 ‘읽을 만한 전자책이 없다’는 것이다. 출판사들이 전자책 시장에 아직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판사 문학동네 e북사업팀의 최종수 실장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동안 매출이 줄어들까 봐 전자책이 성공하지 않길 바란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제 시장도 변하고 큰 흐름이 생겨났으니 우리도 전자책 콘텐츠를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전자책 도서관 콘텐츠 급속도로 업그레이드 ▼
단순히 출판사가 콘텐츠를 풀어놓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최근에는 전자책 업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게 ‘전자책 도서관’이다. 북큐브네트웍스나 아이리버 같은 전자책 업체들은 전자도서관과 제휴해서 전자책 단말기로 책을 빌려주는 서비스를 진행한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마치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듯 도서관이 보유한 전자책을 전자도서관 회원들이 돌려가며 볼 수 있다.
이 시스템에서는 저작권 보호가 가장 중요한 과제다. 따라서 전자도서관은 책을 무료로 무제한 보는 걸 막기 위해 회원들이 빌려간 전자책을 일정 대출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반납(삭제)시킨다. 또 도서관이 보유한 전자책 수만큼만 동시 대여를 허용하기 때문에 책을 빌리려면 다른 회원이 읽던 책을 반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전자도서관은 지방자치단체나 대학 등이 운영한다. 한 가지 특징은 아파트 입주민을 대상으로 전자책 서비스를 지원하는 건설사의 도서관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도서를 전자책 단말기로 서비스하고 있는 전자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이 아닌 GS건설의 ‘자이 전자책 도서관’이다. 풍부한 예산으로 꾸준한 투자를 해온 덕분이다. GS건설은 이달 1일 기준으로 2만2555종의 전자책 11만2775권을 보유해 이 가운데 매월 8400권 정도를 입주민에게 대출해주고 있다. GS건설 주택설계팀 김용빈 대리는 “단지 내 홈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해 입주자 복지 차원에서 진행한 사업”이라며 “지난 7년 동안 연평균 1만6000여 권의 전자책을 구입했다”고 설명했다.
인터파크의 경우 블로그에 쌓여 있는 좋은 글을 전자책으로 바꿔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바꾸는 대신 아예 쓸 만한 새 콘텐츠를 발굴해 전자책을 늘리는 방식이다. 최근 전문가들이 블로그에 자신의 전문지식을 소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이를 모아서 전자책으로 바로 출판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자책은 인터파크 전자책 서점에서 팔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온라인서점인 인터파크는 저자가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독자에게 책을 팔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셈이다.
‘미라솔’디스플레이는 전자잉크와 LCD의 장점을 합쳤다. 사진 제공 퀄컴
해상도도 높아졌다. 이 제품은 화면의 선명함을 나타내는 ppi(인치당 화소 수)가 223ppi다. 가로세로 1인치 넓이에 점이 223개 들어간다는 뜻인데 아이패드의 해상도가 132ppi이고 아이폰4가 326ppi이니 아이패드보다 선명하고 아이폰4보다 약간 덜 선명한 정도다. 기존 대부분의 전자책 단말기는 해상도가 167ppi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전자업체들이 전자잉크 기술을 개선하고 있다. 기존에는 대만의 PVI라는 업체가 전자잉크 원천기술을 갖고서 사실상 전자책 디스플레이 시장을 독점했지만 최근에는 퀄컴 외에도 한국의 LG디스플레이 등이 자체 전자잉크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자책 단말기가 발전하고 태블릿PC가 보급된다 해도 종이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라디오나 신문 등이 신기술의 발전에도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교보문고 류영호 과장은 “글 중심의 소설이나 실용서는 값싸고 집중하기 편한 흑백 전자책 단말기로, 유아교육 도서나 백과사전, 여행서 등은 컬러 표현이 되는 태블릿PC 등으로 특화돼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며 “전자책 단말기는 특성에 따라 특화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디지털 시대 ‘책의 미래’